다이어리
제목: 첫 날 정오 ( 2010. 02. 03. )
분류: 개인작성자: achor작성일: 2010-02-03 14:13:43조회수: 491추천: 0

1.
생각만 해도 흐뭇해 졌던 그 날의 첫 날이다.

오후 느지막히 일어나
대충 TV나 보다가 게임이나 하다가
배가 고프면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던가, 그냥 참던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오늘과 내일의 구분이 없는 안빈낙도의 삶이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깨어난 건 평소와 다름 없다.
오랜 습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세수도 안한 헝클어진 머리에 점퍼 하나 걸쳐 입고
아내 출근길을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어제 트렁크에 실어놨던 지난 2년 간의 짐들이 한 가득이다.

입사를 위한 신체검사를 예약해 놨지만
지난 밤 과음한 것도 있고, 귀찮기도 하고 하여
내일로 연기해 놓고 다시 잠이 든다.


다시 깨어난 시각은 정오 남짓.

좋다, 바로 이것이다!
이런 게 정령 안빈낙도 아니겠는가.



2.
짬뽕 하나 시켜놓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런 날은 짬뽕 하나 먹어줘야 할 것만 같다.

바닥엔 지난 2년 간의 흔적들이 질서 없이 던져져 있다.
영화 공공의 적, 속의 강철중처럼
모나미 볼펜 하나 달랑 들어있는 무소유의 삶을 원해 왔으면서도
그 길지 않은 시간의 짐이 뭐 이리 많나 싶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다 정리해 둬야 할 듯 싶다.



3.
TV를 조금 보기도 했고,
인터넷 신문을 조금 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늘의 의미가 선명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제 이별을 고했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허전하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기계의 한 부품과 같은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호흡했던 사람들과는 거의 영원한 단절을 했다.
퇴근길에 아내와 함께 마트에 들려 쇼핑을 했던 삶의 소소한 행복은 이제 다시 없을 지도 모른다.

잘 정리를 해둬야겠다.
어차피 죽으면 끝날 삶,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삶이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 소중한 시간의 기억들을 잘 정리해 둬야겠다.


앗, 짬뽕이 왔다.
대낮부터 어울리지 않은 감상은 이쯤에서 그만 두고 짬뽕이나 먹어야겠다.

고작해야 몇 시간만 더 지나면
내 머릿 속은 헤어짐의 공허가 아닌 안빈낙도의 행복으로 가득 찰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조금 쓸쓸하다.
이럴 땐 역시,
짬뽕이 제격이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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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achorEmpire
2010-02-16 02:48:57
2주동안...
슬프도다. 이 행복한 시간도 이제 끝이라니... 이직으로 인해 며칠 간 여유가 있었고, 나는 진심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하릴 없이 그냥 있었고, 다음엔 영화를 닥치는대로 봤고, 끝으론 1년 전 시작했다 그만 두었던 홈페이지 버전업을 준비했다. 얼마 전 이직한 yahon은 이 여분의 시간에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걸 후회한다면서 내게 여행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그렇지 않도다, 그냥 이렇게 시간을 향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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