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 주먹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봐서 기분 좋게 날아온다면 한 대 맞아줄 생각이었고,
그렇지 않고 재수 없게 날아온다면 나도 좀 패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산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감시단, 여협, 기윤실, 미디어열사 등의 시민단체 대표들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사람들이
6월에 있을 정보통신문화의 날 맞이 행사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원탁테이블 빈 한 자리에 앉는다.
행사에 관한 토론은 저녁 식사차 찾은 샤브샤브 집에서도 계속된다.
운동은 함께 많이 해왔으면서도 기윤실 사무총장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나와는 좀 맞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같은 사람과 같은 집단 내에서 시민운동을 한다는 게 좀 짜증났다.
그간 로또나 박진영, 박지윤 사건들을 접하면서도
나는 기윤실은 아집에 사로잡혀 그들만의 윤리를 세상에 강요한다고 느껴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편견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에서 기윤실 사무총장을 접했기에
그 반감이 더 컸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의 말과 행동은 그 거침 없음만큼 과격함과 무지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미디어열사의 공동대표분 역시 한 차례 오버를 하셨다.
정부가 그들 마음대로 집행하고, 행동하면 될 것이지, 뭔 공청회나 세미나를 열며 그리 분주해 하느냐,고 하시는 게
이 사람,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지금의 참여정부가 가장 잘 하고 있는 점 중에 하나로
국민들에게 묻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행동하는 그 과정이라 보고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불필요한 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던 것은
내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안전넷, 그 주관단체 한국사이버감시단의 대표간사 자격으로 존재했던 게다.
그러니 각 단체들간의 조율을 담당해야 하는 위치에서 그들의 대표한테
너희, 잘못 되었다, 혹은 너희, 내 생각과 다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대체로 할 얘기는 하고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나 역시 사회적인 지라
이것저것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그리 좋지는 못했다.
나도 나름대로 짜증이 났었지만
다른 이들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경직된 구조에 짜증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경직된 문제를 좀 풀어낸 것은 다름 아닌 학연이다.
윤리위원회의 대표로 참석하신 분이 내 대학 선배로,
나와 학연이 있음을 알게 되신 후부터는 좀 너그러워지시기 시작했다.
그 역시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었는데
그런 국민에 관련된 정부의 문제가 고작해야 학연 따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 역시도 그와 학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후배를 위하여 술 한 잔 사고 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나 역시도 별 다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실망을 할 수 있었을 뿐.
모두가 돌아간 후 나는 단장과 술 한 잔 하며 독대를 했다.
나는 그제서야 기윤실 사무총장과 미디어열사 공동대표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고,
또한 너희들과는 달리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쉽게 시작한 이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교 이후 내 최고의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와 단장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던 고깃집에서 엄청난 육성으로 논쟁을 하였고,
그것은 적어도 한 주먹을 감수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만큼 치열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기능에 대한 해답으로
인터넷 실명을 법제화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이가 오프라인과 동일하게 자신의 실명 인증을 받은 후에야
회원 가입을 할 수 있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게시판에 글 하나 쓰는 데에도 실명을 인증받아야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인터넷의 취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단장의 말 또한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미성년자, 또 성인들까지도 음란물과 폭력물에 빠져 살인이라든가 강간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는 있는데
지금까지도 인터넷 상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는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또 피해자가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님에도
나는 제대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선량한 많은 이들의 행동에 전체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제한을 가하는 것은
결코 타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는 서로 무너지지 않을 산을 만들어 가며 더욱 굳건해 지고 있던 중이었고.
단장의 성격은 꽤나 화끈했기에 아무리 치열한 논쟁이 있다 하여도
나는 그 결말만큼은 역시 화끈하리라 예상했다.
술이 좀 들어간 막판에 가서는 술 앞에서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봤던 게다.
치열했다 한들 그 논쟁은 이 술자리의 안주의 역할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장은 내가 평소와는 달리 좀 예의를 가리지 않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에 실망을 했든지
혹은 자신만큼 해보지도 못한 내가 시민운동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사실에 답답했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술자리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끝나게 된다.
역시 인간관계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적의 없이 궁극적으로는 감시단을 위하여 이야기 했던 것인데,
인터넷 문화를 이야기 하는 시민단체로서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의견과 상충된다는 게 결코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데
내 부족한 말주변과 미숙한 행동 때문에 오해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시민운동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하여도
내 생각과 뜻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만족한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사람들과 논쟁할 때 쉽고, 편안하게 들어내는 자세는 더욱 배양하긴 해야겠다.
물론 그야 연륜이 쌓여야 가능할 법도 하다만.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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