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사랑에 관한 두세가지 이야기들 2

작성자  
   achor ( Hit: 208 Vote: 1 )

사랑에 관한 두세가지 이야기들 2













1. 가을을 좋아하세요?

참 맑은 날이었다. 파란 하늘은 덧없이 높아만 보였고, 간
혹 보이는 구름은 부드럽고 상쾌한 게 꼭 박하사탕 같았다.
난 들판에 누워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래로 넓게
펼쳐진 학교의 풍경은 가슴을 촉촉하게 하였다. 때때로 책을
덮곤 그대로 누워 상념에 잠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항상
시원한 바람이 내게 지난 추억을 가져다주곤 했다. 난 기분
이 참 좋았다.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름다운
옛 추억들... 난 평화로웠다.

그 날은 박인환의 시집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난 그 회색
빛 절망과 허무에 빠져 왠지 무거워진 느낌으로 템즈강을 상
상하고 있었는데 그 때 아무도 오지 않던 그 곳에서 낯선 목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가을을 좋아하세요?"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수줍게 화장
을 한 갈색머리의 한 여자가 내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내게 처음으로 다가왔는데 난 어리둥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을을 좋아하냐고?' 난 내
가 가을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
았다. 솔직하자면 그 꽤나 예뻤던 여자 앞에서 난 긴장하고
있었던 게다.

그녀는 내 답변을 듣지도 않은 채 조용히 내 옆에 앉아 마
치 무슨 고백이나 하듯이 조용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전 무척이나 가을을 좋아한답니다. 이 낙엽 떨어지는 소
리, 이 투명한 하늘, 그리고 이 시원한 바람... 전 이 매력
적인 가을이 가고 난 뒤 찾아올 겨울이 두려워요."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그녀의 돌발적인
등장을 되새기며 그녀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셔츠에 감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가
어쩐지 성적 매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거 알고 계세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항상 비
가 내린다는 사실 말이예요. 그 비는 가을의 여신이 흘리는
눈물이랍니다. 그녀는 세상을 사랑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거
든요. 세상에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나봐
요. 왠지 이번 가을은 제 젊음의 마지막일 것 같아요."

그녀가 특별히 '마지막'이란 단어에 강조를 둔 것은 아니
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낱말이 내 귓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이란 단어는 쓸쓸하고 허
전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을의 마지막 비가 내리는 날 만나기로 해요. 학교
앞 빨간 우체통이 보이는 카페에서 말예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무언가 이야기를 해
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은 처
음부터 꽉 붙어있었다는 듯이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이 참 아름답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후 일어
났다. 그리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내곁에서 사라져갔다.

그녀가 간 이후로 한참동안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책을 읽다가 깜박 잠들어 꾼 꿈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
고, 아무 말도 못한 내 자신에 대해 분노가 생기기도 했다.

그 날 이후로도 가을은 참 아름다웠지만 그 날의 일에 대
한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같다. 너무 갑작스럽게, 또 너무 순
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도대체 그것이 꿈이었는지, 내 공상
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내 무의미한 하루하루는 흘러갔고 나, 아니 우리가
사랑하는 가을도 흘러갔다. 모두들 교수의 이런저런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난 창밖으로 보이는 마지막 가을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가을은 참 짧았다. 가을의 그 쓸쓸
함에 빠져 고독을 즐기고 싶을 즈음에는 항상 겨울이 다가오
고 있었으니 말이다.

톡, 톡.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방
울 한 방울 빗방울 떨어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거 알
고 계세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항상 비가 내린다
는 사실 말이예요.' 난 그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해냈
다. 비가 오는구나... 그녀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까?

아무리 그 날을 되집어봐도 그 일이 꿈인지 생신지 도무지
감이 잡하지 않았다. 이거 참 어떻하지? 그녀를, 그녀의 존
재를 믿고 싶었지만 그 내 믿음에 배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
았다. 이미 내 가슴 속에는 그녀 생각뿐이었다. 만약 그녀의
존재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 난 상처를 받
을 것 같았다. 스무 해 남짓 살아온 삶 속에서 난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진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아주 평범하게 조
용히 살고 싶었다.

결국 난 한 번 더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를, 내
자신을. 만약 그 날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
가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확신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날의 약속을 무시해버리는 건 그 날 그녀
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묵계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
다. 그녀가 날 배신한다 해도 난 그녀를 배신하고 싶지는 않
았다.

허겁지겁 가방을 싸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와 촉촉히 내
리는 비를 맞으며 Virginia Wolf란 카페로 들어섰을 때 그녀
는 그 빨간 우체통이 보이는 창가 옆에 앉아 무엇인가 읽고
있었다. 그녀 옆에 놓여진 검은 점이 박힌 하얀 우산이 그녀
와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왔구나... 꿈이 아니었구나... 커다란 안도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을 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
으며, '오셨네요.'라고 말을 하였다. "전 당신이 꼭 올 거라
고 믿었답니다."

그녀가 날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그녀를, 그녀의
존재를 의심했던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믿
음, 특히 사랑에 있어서의 믿음, 그것은 절대적이어야 할 것
만 같다.

우리는 따뜻한 홍차를 함께 마셨고, Music Factory란 Bar
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아마츄어 밴드들의 공연을 봤다. 그
리고 적당히 술에 취해 그녀의 집으로 함께 향했다.

그녀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
다. 10평 남짓 되어 보이는 그곳은 심플한 도시적 이미지를
풍겼다.

우리는 그녀가 빌려놨던 로저 콜먼의 'Wild Angels'란 고
전적인 허무주의가 담긴 1966년 産 공포영화를 함께 보았다.
'할 말은 아무 것도 없다', '어디에도 갈 곳은 없다'란 대사
가 흘러나올 즈음 그녀는 옷을 벗었다. 그녀는 生의 마지막
일 듯이 정렬적이었다.

그 후 많은 날이 흘렀지만 그 날 이후 난 그녀를 단 한 번
도 만날 수 없었다. 특별히 연락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
도 아닌 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난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너무나도 큰 그리움에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녀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의 문도 단단히
잡겨져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그 마지막 가을의 비를 맞으
며 세상을 떠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녀는 가을의 여신이었던 것만 같다. 세상을 사랑
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그 비운의 가을의 여신 말이다...









2. 섹스를 방관하는 여인의 시대

우리는 세상에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Virginia Wolf'란
Bar로 향하곤 했다. 그곳은 항상 빌리 홀리데이나 쳇 베이커
의 Jazz가 흘러나오곤 했는데 그 끈적끈적한 음악을 듣고 있
노라면 정신이 노근해지는 게 온갖 걱정과 고민이 말끔이 해
소되는 것만 같았다.
그 날도 우리는 이와 같은 이유로 언제나처럼 Virginia
Wolf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묵묵히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
신다, 가끔 담배를 피운다... 그것이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였는데 이상하게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그 모든
것이.

때론 여자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혼자, 혹은
둘 정도 온 여자들에게 접근하여 함께 술을 마신 후 그리움
을 해소하기도 했는데 그건 내 친구가 전문이었지, 난 그다
지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 중 한 명만 능
숙하여도 역시 그걸로 충분하였다.

그 날도 난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머리 끝까지 오
른 스트레스는 광란적인 섹스로만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 테이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까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 여자
한 명을 발견했다.

"재 어때?"
"난 생각없어. 너나 해."
그가 생각이 없다고 하면 정말 그런 거다. 그는 절대 빼거
나 가식적으로 행동할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내가 하겠어."
난 약간의 술과 그간 그가 해왔던 행동들을 옆에서 지켜본
노하우로 자신있게 말해보았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녀에게 다가갔다.

"같이 한 잔 할래?"
"좋아요."
간단한 게 마음에 들었다. 필요없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다. 난 남의 쓸데없는 얘기들을 들어
줄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몇 살이야?"
"20살. 오빠는?"
"22살."

그녀는 20살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18살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새어머니가 들어와 가출을 하여 지금은 주유소
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새엄마와 난 맞지 않아요. 새엄마는 내 모든 걸 바꿔놓으
려고 해요. 하나하나, 환경이 바뀌면 새롭게 적응을 해야한
대요. 그렇지만 난 그게 싫어요. 난 그저 지난 시절처럼 지
내고 싶은 것 뿐인데... 전 그저 지난 시절처럼 조용히 지내
고 싶었다구요."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난 무척이나 섹스를 하고 싶었
다. 까닭모를 저항감이 내 가슴에 너무도 굵게 불타고 있어
서 무언가로 해소시키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가자."
"어딜?"
"자러."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난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겼다. 그녀
는 몸을 내게 맡기고 리듬에 따라 육체를 흐느꼈다.
그 날의 섹스는 내 생애 중 가장 장구하고 광폭적이었다.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정액과 땀으로 범벅이 된 침대에
누워 같이 담배를 피웠다.

"넌 섹스할 때 어딘지 이상해."
"뭐가요?"
"글쎄... 딱 꼬집어 말할 순 없겠지만 어쩐지 섹스를 방관
한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런 느낌이 들어."

그 말을 듣자 그녀는 피식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아주 은
밀한 목소리로 내게 고백을 해왔다.
"사실 전 섹스에 흥미가 없어요. 단지 섹스에 이르는 그
과정이 즐거울 뿐이거든요. 행위가 아니라 행위까지 가는 과
정말예요. 섹스는 제게 있어서 노동, 그 이외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아요. 남자들이 절 유혹하는 과정만이 제게 흥미롭
죠."
그녀는 여기까지 말한 후 나를 보며 살며시 웃은 후 다시
얘기를 이었다.
"사실 오빠는 쓸데없이 지루한 말이 없어서 참 좋았어요.
많은 사람들의 유혹을 경험하다 보면 안목이 생기거든요. 처
음 오빠가 아주 간단하게 '같이 한 잘 할래?'라고 하셨을 때
다른 남자들처럼 떠벌리지 않는 게 참 마음에 들었다구요."

담배를 비벼 끄며 내가 말을 받았다.
"난 항상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 나를 둘렀나 환경
은 항상 변하고 있으니 말야."
"오빤 무언가 새로운 걸 원하고 있나보죠?"
"글쎄... 예전엔 그랬을 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는 안주하고
싶어."
"그렇지만 말예요, 과연 이 시대에 무엇이 새로울 수 있을
까요? 문화는 너무나도 다양화되어 있어 세상이 갈기갈기 찢
겨져 있는 느낌이라구요. 하나로 뭉쳐 함께 생각하고 고뇌하
고 싶은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 취향뿐
이라구요. 안 그래요?"
"..."

그녀는 내게 연락처를 적어줬다.
"내일 꼭 연락하세요."

다음 날 약속대로 난 그녀와 짧은 전화통화를 했다. 그건
약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할 수 있음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 대화 단절의 시대에.
그렇지만 One Night Stand는 왠지 그래야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좋은 감정이 남았더라도 다시 그녀를 만나면 모든 것
이 연기처럼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좋은 건 좋은 그대
로 남겨두고 싶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다 나은 걸 추구
하다 모든 걸 망쳐버릴 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고 싶진 않다.
이제 난 안주하고 싶다.

그녀가 새어머니란 상황에 동조하지 못한 채 선에서 이탈
해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어딘가 어긋나 있는 세상에 혼자 떨
어져있는 느낌이다. 시대와 어울릴 수 없는 시대. 무언가 저
항하고 싶은데 무엇에 저항해야할 지 모르겠고, 무척이나 절
망적인데 무엇때문에 절망적인 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런 하룻밤의 만남과 헤어짐을 계속해야하는 것
일까? 절대 강자가 나타나 나를 한순간에 매료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난 안주하고 싶다.
이 돋 같은 세상에, 이 의미없는 세상에...
그리고 이 정든 세상에 말이다...









98-9220340 건아처


본문 내용은 9,59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c44_free/22620
Trackback: https://achor.net/tb/c44_free/22620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Please log in first to leave a comment.


Tag


 28156   1482   155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   댓글들에 오류가 있습니다 [6] achor 2007/12/0856059
25230   (아처) 삐삐해지 achor 1996/08/10154
25229   (아처) 사고배분 achor 1996/07/12202
25228   (아처) 사고의 미숙성 achor 1997/05/31194
25227   (아처) 사고의 미숙성 2 achor 1997/06/05111
25226   (아처) 사과 achor 1997/03/28220
25225   (아처) 사과의 글 3 achor 1997/08/24194
25224   (아처) 사기꾼 아처, 체포 위기! achor 1998/07/16205
25223   (아처) 사기도박단에 걸렸당~ T.T achor 1997/06/23204
25222   (아처) 사내아이처럼 놀기 achor 1999/01/26195
25221   (아처) 사내아이처럼 행동하기 achor 1999/04/08161
25220   (아처) 사랑 achor 1999/10/24200
25219   (아처) 사랑 낙서 achor 1997/10/01190
25218   (아처) 사랑(3) achor 1996/08/31215
25217   (아처) 사랑(4) achor 1996/09/08209
25216   (아처) 사랑과 우정 achor 1996/07/17156
25215   (아처) 사랑과 우정 이야기 achor 1998/03/28181
25214   (아처) 사랑에 관한 두세가지 이야기들 achor 1998/02/25191
25213   (아처) 사랑에 관한 두세가지 이야기들 2 achor 1998/11/18208
25212   (아처) 사랑에 대한 나의... achor 1997/01/20153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58  159  160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