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다이어리 (2005-04-26)

Writer  
   achor ( Hit: 1434 Vote: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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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      개인

1.
S다이어리,는 사실 기대 이하의 영화였다.

재미있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화려한 볼거리나 교훈적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무덤덤한 스토리만 나열되는 지리멸렬한 영화였는데
괜찮은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밖에 못 만든 탓은 전적으로 감독의 무능 때문이리라.

영화보단 내 삶의 S다이어리가 오히려 나은 듯 했는데
적어도 내 그것에는 영화 속 남자들처럼 매몰차거나 냉정하지 않은
그리운 옛 추억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2.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시절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주 오래 전 헤어진 연인이 갑작스레 나타나
일종의 위자료를 청구한다면?

당신은 어떡하겠는가?



이런 정말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 삶의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놀라움과 황당함 반, 그리고 반가움과 그리움 반인
그런 오묘한 느낌을 받았다.



3.
내 나이 23살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 나이 19.

23살의 나는 어리고 미숙했음에도 나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오전엔 병역의 의무를, 오후엔 학원강사를, 밤에는 아처웹스.를 시작하며
몹시 피곤하고,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속으로는 홍콩 영화에 나올 법한 세기말의 쓸쓸함을 갖고 싶어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젊음의 화려함을 향유하고 싶어하면서 엇갈린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새천년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 있던 1999년 그해 겨울,
어디에도 마음 두지 못한 채 그리도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났던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면서도 그러나 결코 가깝지 못했던,
특별한 관계로 남아있게 되었다.



4.
그녀의 요청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떡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기엔 내가 너무 바보 같게 느껴졌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해 버리기엔 나는 너무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본다.
나로 인해 고통을 겪은 점이 있다면 내가 보상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미 너무도 과거의 일,
이미 멀어진 이의 전화 한 통 달랑 받고 순순히 응해주는 것도 우습다.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거나 혹은 세상을 너무 매몰차게 사는 일에 관한 갈등이다.



5.
어찌 보면 꽤나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흥미로운 느낌이 더 크다.
나른한 내 삶에 촉촉한 단비처럼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 버린 그런 느낌이다.

때마침 S다이어리,라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떠올라
지난 밤 영화를 보고 잠을 잤는데
이런 영화적인 현실은 어쨌든 환영할만한 일이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추운 겨울, 나는 매서운 강풍이 불어올 때면
나는 몸을 움츠리는 대신 오히려 가슴을 활짝 펴고, 온 몸에 힘을 쭉 뺀 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주 투명하니 바람, 네가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나를 산산히 꿰뚫고 스쳐가거라,
나는 자연의 일부로서 너를 받아들일 것이니 마음껏 나를 헤치고 가도 좋다,

라고 외치곤 했다.
그럼 그 차가운 바람도 아무 감촉 없이 나를 투과해 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사랑도,
나는 이곳에 가만히 서서 지긋이 눈감고 가슴을 활짝 펴고 있으면
사랑은 자기가 가야할 길을 찾아 나를 스치고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사랑의 종착점이 아니다.
나를 어떻게 해버려도 좋으니 마음껏 헤치고 가도 좋다.

사랑은,
투명한 나를 투과해 가버리는 느낌이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13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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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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