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22번째 생일을 보내며... (199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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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251 Vote: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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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사사 게시판』 30750번
 제  목:(아처) 21번째 생일을 보내며...                              
 올린이:achor   (권아처  )    98/11/27 01:28    읽음: 37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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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눈을 떴을 때 집엔 나 혼자밖에 없었다.
헉. 다들 시골 가셨지. --;
올해도 미역국은 물 건너 갔구나. 흑. !_!

여전히 지각하여 돋나 꾸사리 먹고 점심시간.
난 무척이나 눕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누울 곳을 찾아다니다 정착한 곳은
바로 11월의 옥상이었다.

요즘 꽤나 추웠던 거 같은데 그 날은 햇살이 참 따스했다.

난 잠시 옥상에서 아래 세상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사람들 속에 끼어 살고 있구나란 생각을 하며
하늘 높이 솟은 태극기 밑에 누웠다.

이치은 씨의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란 책을 보았다.
그곳에서 권태로운 자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만다.
난 1년 전의 나였다면 틀림없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널널함'은 그가 말하는 '권태'였다.
한때 끄적이다 말았던 '널널한 자들, 62-3에 모이다'가 생각났다.

조금 눈을 붙일 생각에 책을 덮곤 마음을 편안히 했는데
아무리 따사로운 햇살이라 해도 11월은 11월이었나 보다.
세멘 바닥이 어찌나 차갑던지 등골이 오싹하기 시작했다.

그래. 인내야. 인내.
난 참고 견디고자 했다.
난 때론 별 것 아닌 것에 고집을 부리거나 저항하곤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금새 타버렸다.
담배를 빨리 피던 모야모양 선영이 생각났다.
갠 참 담배를 빨리 폈다.

해옥도 생각났다.
'민트향기'란 아이디는 그 이름만큼 참 향기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디를 생각하고 있으면
정말 어디선가 민트향기가 나는 것 같다.

아. 오늘이 생일이었지.
나조차도 깜빡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던 그 날.
이렇게 그 의미가 조금씩 조금씩 소멸되어가다 보면
언젠간 아주 텅 빈 공간에 도달하고 말겠지...
마치 어느 지하 창고 같은, 아주 어둡고 또 아주 텅 빈
그런 빈 공간...

21살. 무언가 해야할 것도 같은데...
강여상과 한명회을 생각하며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고 되새기지만
조급해진다. 조급해진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
아직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 그건 슬픔이다.

태어난 지 21년이 되던 날,
난 그렇게 누워있었다.

차가운 세멘바닥에 홀로 가을 혹은 겨울 바람을 맞으며.
그리고 파란 하늘과 펄럭이는 태극기, 따스한 햇살 속에서.

내 청춘에 애도를,
우리의 젊음에 애도를.






                                                            98-9220340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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