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Adieu 1998 (199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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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026 Vote: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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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tc

『칼사사 게시판』 31039번
 제  목:(아처) Adieu 1998                             
 올린이:achor   (권아처  )    98/12/31 02:43    읽음: 18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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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 [대입, 통신, 독립]
  1997년 : [입원, 구속, 입대]
그리고, 그리고...
  1998년... 오늘은 1998년의 마지막 날.

난 항상 한 해를 세가지 커다란 사건으로 정리하곤 했는데
도무지 올해는 세 손가락 꼽기가 여간 쉽지 않아.

올해 난 신년 휘호를 [備來添我]로 썼었거든.
무언가 이룬 것 같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애매모호한 느낌이야.



아무래도 올 한 해는 정리적 측면이 강했던 것 같아.

1996년이
  대학에 입학하여 어떤 신분적 발판을 마련했다거나
  통신을 삶의 일환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거나
  독립하여 내 힘으로 살아가는 걸 시작했다거나...
그렇게 모든지 시작하던 해였다면

1997년은
  불규칙한 생활과 과도한 흡연, 음주로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거나
  어줍은 철학으로 세상에 저항하다 혹은 완전 범죄를 꿈꾸다가 구속당했다거나
  모든 걸 끝마치는 듯이 입대를 했다거나...
그렇게 가장 큰 사건이 많았고, 마음껏 방황하던 때였거든.

그렇다면 이번 1998년은
벌여놨던 사건들을 차근차근 정리한 해인 듯한 기분이 들어.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세가지 사건을 꼽아보자면, 음...
[널널, 소설, 입대]정도?









올해 난
지난 1997년 겨울, 첫 번째 맞이한 입대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다시금 자유를 얻어 거리를 헤맬 수 있었고,
또 생애 최초로 200일이란 대장정을 걸어올 수도 있었어.

마치 [이제는 더이상 잃을 게 없다고 큰 소리로 외]칠 때,
[흐릿하게 눈물 넘어 이제서야 잡힐 듯 다가오는 희망을 느]낀 기분이야.

기억이 나.
월미도의 그 바다...
배경은 아주 검은 밤이고, 우리 얼굴엔 웃음이 있었어.
그 때가 기억이 나.

지난 두 해보다는 덜 하겠지만
스쳐지나간 인연들도 많이 생각나고.

또 그 오랜지 빛 가로등 아래서 책을 읽던 날이나
여름, 무척이나 비가 많이 오던 날 지하철이 사라져 당황하던 모습도,
교보문고에서 숨은 그림 찾기도, 작가 박일문을 만난 일도,
영등포, 대학로에서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모습도...

그렇지만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권태로운 자유였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해.

더이상 [널널한 일상]이 없다면, 만약 그렇다면
아.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내가 하고픈 일들을 아무 제한없이 할 수 있었던 시절.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리고 이번 한 해동안
아마도 내가 그 전까지 보아왔던 양만큼이나
소설을 읽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

[이성이 감성을 지배해야한다]란 이유없는 투철한 신념으로
과거, 난 소설을 지양, 아니 배격했었거든.

소설을 읽으면 왠지 나 자신이 나약해지는 느낌이었어.

아직도 그 어린 시절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던 철학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들고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 해.
내가 요즘 욕하고 있는 가식의 표상이 바로 과거의 나였으니 말이야.

감성을 키우고 싶었었어.
사랑을 하고 싶었거든.
그냥 일반적인 사랑말고, 아주 가슴 뜨거운 사랑말이야.
그럴려면 감수성이 예민해져야할 것만 같았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혼자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우고,
이별에 슬퍼하고, 작은 편지에 감동할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사랑, 그런 걸 해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었었는데,
음. 이제는 차츰 그만둘 예정이야.
사회속에서는 역시 소설의 의미, 감성적 측면이 퇴색돼.
아주 냉혹한 세상이니까 말이야.

어쨌든 신선한 경험이었어.
올 한 해 한 일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리고 마지막은 두 번째 맞이한 입대.
겨우 훈련소 한 달 갔다온 것뿐이지만.

그래도 나를 가장 많이 변화시킨 이 사건은
내게서 너무도 사랑하던 [권태로운 자유로움]을 앗아가버렸어.

이제는 무엇을 계획해야하고,
그 다음 날을 고려해야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게다가 내게 사회를 가장 잘 알게 해주고 있고.

미래의 삶을 생각하게 돼.
매일 이렇게 기계적인 일들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두르고선 
매일 똑같은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삶의 어떤 측면에 의미를 두어야할 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아직 이건 시작이니까...
익숙해지다 보면 또다른 즐거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긴 해.

어쨌든 입대로 인한 상황의 변화,
올 해 가장 내게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





오늘은 1998년의 마지막 날, 이제 곧 난 23살이 될 거야.
나이를 만으로 계산하려고 해.
그럼 겨우 21년밖에 살아온 게 아니잖아.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조급해지지 않아야겠어.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특정일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느낌이 들어.

생일도, Christmas도, 한 해의 마지막 날도...
모두 아주 평범한 보통의 날들과 같다는 느낌으로 대하고 있거든.

단지 그런 날은 무엇을 하는 게
세상 흐름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거라는 사회적 관습,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

어쨌든 이제 또다른 한 해가 시작될 거라구.
자. 힘을 내야지.
숫자놀음밖에 되지 않겠지만 어쨌든 천년의 단위가 바뀌는 한 해야.
기대해도 좋아.
노스트라다무스가 실언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21C는 없어! 힘을 내! 모든 게 끝이야!
마지막을 즐기는 거야! 꺼억!

새로운 기분으로 희망하게 또 한 해를 맞이해야지.
편지에서 봤던 그 구절,
[요번 겨울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기다려지지 않니?],
[요번 새해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기다려져].

떠오르는 뜨거운 태양이 보고 싶어지는 걸...











                                                            98-9220340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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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