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초콜릿 2 (200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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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사사 게시판』 38119번
 제  목:(아처) 초콜릿 2                                             
 올린이:achor   (권아처  )    01/05/18 03:47    읽음:  0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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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2001/05/11 06:02:57 

    사실 충격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덕분에 내일 아침 일찍 나서야 하기에 잠을 좀 자두려 했지만 
    피곤하면서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언젠가의 발렌타인데이, 
    나는 부산에서 배달되어온 초콜릿을 받은 적이 있다. 
    예쁘장한 박스에 정성스럽게 담겨져 있는, 
    그 달콤한 초콜릿을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화이트데이. 
    나는 왜 그 아이에게 사탕을 주지 못했을까. 
    분명 서울로 올라온 그 아이의 주소를 알진 못했지만 
    주소를 몰랐다는 그 자체가 핑계는 될 수 없다.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미 생겨버린 거리감. 
    그것이 문제였다고 나는 이제서야 단정짓는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는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유 없는 호의도 존재치 않고, 보상 없는 희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초콜릿을 받고도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기에 
    영영 그렇게 찜찜한 기분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하기엔 불만이 너무 크다. 
    
    일본에서 소포가 도착해 있었다. 
    그 박스에는 일본 특유의 독특한 초콜릿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다시 초콜릿을 생각한다. 
    초콜릿. 


      지난 가을, 사랑을 한창 갈구하고 있을 때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네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고, 함께 나갈  적당한 
    파트너가 아니냐고. 난 아무 말 하지 못했었다.
            
      이 말은 그 아이에게도 적용된다. 만약 사랑이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게다. 누가  되도 상관이 없는, 그런  파트너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다리기 지쳐서 다른 사랑을 찾는다
    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내 사랑은 너무도 완벽해서  기다림
    에 지칠 수 없다. 어려 보이는 내 사랑에 대한 환상.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조
    금은 아쉬워졌다. 무엇이든  마지막은 아쉬운 여운을  준다. 
    전장에서 적장을 죽이는 맞수의 허무감까지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다. 그 아이와  헤어지며 이제 다시는 초콜릿  먹을 
    수 없겠구나,라고 말해주고 왔다. 친구의 사랑을 깨가며  초
    콜릿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
        
      사랑은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다. 노는 거야 누구든 상관없
    다. 아무나와 놀아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사랑은 안 된다.
        
      바람이 차갑게 분다. 겨울이다, 겨울. 여름을 기다리며 생
    각한다. 그 차가운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된다고. 아무리 
    추워도 몸을 투명하게 하고, 온갖 추위가 내 몸을 투영해 가
    도록 내버려두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난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 나를 지배하라,고 외치면 추위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실연의 슬픔 같은  거창함은 아니지만 마지막이란  감정은 
    역시 아쉬웠다. 그렇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을 
    기다리며 감정이 나를 투영해 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일.
            
      친구에게 전화 걸어 장난이었다고, 정말 몰랐다고, 앞으로 
    잘 해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덧붙여줬다. 다시는 그  아이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역시 삶은 살아볼 만 하다. 이런저런 색다른 일들이 저 멀
    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새벽 무렵 전화가 한 통 왔다. 
    내가 수화기를 들자 전화를 끊는다. 
    그러나 나는 발신자표시서비스 이용자. 
    
    나는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건다. 
    옛 초등학교 친구이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술을 마셨다며, 친구를 통해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그 친구는 이야기 한다. 
    
    나는 다시 초콜릿을 생각한다. 
    
    결국 DB가 한계를 맞이하였나 보다. 
    더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아침이면 정식 개장해야할 것인데,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가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5시. 
    자고 있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잔혹하고, 냉정한 나는 그 아이를 깨워버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초콜릿을 생각한다. 
    초콜릿. 
    달콤하지만 달콤한 초콜릿. 
    

      사랑이 파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제한적이고 유한적인 사랑, 그것은 파멸이다. 혹 그
    것은 파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쓸쓸
    한 사랑의 그리움을, 그  아쉬움을 느껴보지 못한 자라고 단
    정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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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둘러싼 바람이 한 차례 거세게 몰아지곤 지나간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안정적인 걸 찾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변혁의 물결은 20대 초반의 열정으로 족하다.

    좋아하는 여름이 오고 있다.
    또 다시 거리는 생동하는 젊은이의 열기로 뒤덮일 것이고,
    가슴 가득한 뜨거움이 세상을 온통 적셔 놓을 것이다.

    몹시 차가운 바람이 불 때면
    나는 나를 어떻게 해버려도 좋으니 마음껏 나를 투영해 가라고,
    바람을 향해, 겨울의 차가움을 향해 외치곤 했었다.

    올 여름,
    혹 몹시 뜨거운 열기가 나를 휩싼다 하여도
    나는 마치 겨울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무위의 자세로
    나를 마음껏 투영해 가라고 외치고 싶다.

    나를 어떻게 해버려도 좋으니 마음껏 나를 투영해 가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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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