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오늘의 승전보 (2002-12-13)

작성자  
   achor ( Hit: 990 Vote: 32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외출을 하였다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만 분주해 진다.
세상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내게 커다란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평소 적잖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내가 이런 고백을 할 때면 꽤나 놀라는 시늉을 하며
너는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라고 반응해 주는 편이다.

원체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그들의 반응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사실 나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던가.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잠들 때까지 보내는 시간들.
나는 그 시간들을 버텨내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언젠가는 도저히 참지 못해 다이어리에 쪽팔리게 그런 고백 또한 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나는 참을 수 있을 만큼 잠을 참다가
쓰러지면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잠드는 스타일의 수면 방식을 갖고 있다.

이것 또한 스스로에게는 거창하지만 사실은 궁색한 변명이 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비정상적으로 비춰질만큼 디아에 몰입해 있는 까닭도
역시 지난 번 고백처럼 현실, 그런 스트레스로부터의 도피의 의미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평소 디아 등의 소일을 하며 내 삶의 중대한 문제들을 가볍게 여기다가도
외출만 하면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그것이 현실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례적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우선 중간고사 이후 처음으로 대학로 학교에 가서
교수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몇 년동안 지루하게 끌어왔던 자원봉사증명서를 제출했으며,
졸업에 관한 상담 또한 해냈다.

뿐만 아니다.
얼마 전 새로 계약했으나 진행을 하고 있지 않았던 업무도 시작하였고,
몇 주 전부터 요청했던 한 리뉴얼 작업도 처리했으며,
역시 질질 끌어온 새로운 계약도 체결해 냈다.
담당자들은 나의 적극적인 모습에 내심 놀라는 눈치를 보인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대견하다.
나는 오늘 꽤나 성실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혹사시키지는 않았다.
나는 점심 무렵 친구와 옛 기억이 스며있는 커피숍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좋다. 오늘은 나를 위해 박수를 한 번 쳐줘야겠다.
최근 작정하고 자기 비판에 경주하고는 있지만 오늘만큼은 근래 보기 드문 대단함이었다.
만 24시간 넘게 꼬박 잠을 참고 있는 보람이 있다.



오늘 아침
또다시 잠 때문에 등교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잠을 참으며 이리저리 시간을 축내다 옛 다이어리를 보게 되었는데
한때 나는 여전히 잘 나간다,라는 말을 종종 쓰곤 했었으나
지금은 전혀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건전하고 이성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 잘 나간다,의 의미가 혹자의 예상처럼 여성 편력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나에게 느꼈던 매력도의 한 척도였을 것인데
그것을 보면 나는 최근 나에게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모두가 학생일 때 나는 명색만큼은 벤처의 사장에, 신문사의 명예기자에, 잡지사의 팀장, 칵테일바의 바텐더, 경찰청의 프로그래머 등
일을 제대로 해내든 못 해내든 여하튼 명색만큼은 화려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가.
그 학생이던 친구들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거나 CPA나 PD가 되어 있고, 또는 대기업에 취직하여 어깨를 피고 있는 반면
나는 쓰러져 가는 중소기업의 허울만 가득한 대표로 아무 생산적인 것도 하지 않고 디아나 하는 백수로 탈바꿈해 있었으니
내가 잘 나간다,라는 말을 쓰지 못했던 것도 그 까닭이 있었나 보다.



오늘 하루만큼은 나의 승리로 기록해 둔다.
당연하다.
오늘은 외출을 했던, 좀 특별한 날이었다.
다시 내일이 되면 나는 여느날처럼 나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달며
또다시 핀들스킨이나 닐라탁을 향해 프로즌오브와 휠윈드를 날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오늘 하루쯤의 자축도 그리 욕먹을 건 없을 게다.

그러나 나를 패배주의자로 보는 시선은 정중히 사양한다.
나는 그저 최근 작정하고 나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년까지 계속될 학생이란 신분속에서 그 특권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뿐이다.
부럽다면 그대도 학교를 더 다녀라. --+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01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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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