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회 (2003-01-25)

작성자  
   achor ( Hit: 1609 Vote: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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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7년만의 만남이었다.
비록 적어둔 삐삐 번호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던 시절에는 졸업앨범 뒷편의 연락처를 통해 만날 수 있었지만
독립을 하고, 삐삐를 없애고, 새로운 전화번호가 생겨남에 따라
옛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었다.

물론 어떻게든 연락을 해야했다면 만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소원해진 관계를 시간이 흐른 후에 되찾는다는 것이 또 막상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창 둘이서 여자애를 만나다 알름알름 연락처 아는 동창들을 불러 모은 게
갑작스레 반창회가 되어버렸고,
몇 달 전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한다던 동창과 우연히 만나 연락처를 주고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나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게다.
신촌, 한 술집의 구석을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40명 남짓 되는 친구들이 두 반으로 나뉘었던 우리 부천고 불어반은
서로간의 유대가 상당했었다.
3년 내내 서로 한 반이나 다름 없었는 데다가
한 반 2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다 보니 반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대개 강렬한 편이었다.

7년만에 등장한 난 그리하여 도착하기 직전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이야기 되고 있던 중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평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평범하지는 않은, 적당히 범상찮은 행동은 간혹 했던 지라
지난 7년간 내 소문은 엄청나게 뒤틀려 친구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대학교를 잘렸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였다.
아마도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님에도 학교에서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창들이 진원지인 것 같은데
친구들은 내가 아직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외에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중이라던가 TV에서 봤다는 소문, 벤처로 성공하여 거부가 되어있다는 소문 등
말도 안 되는 무수한 소문이 나를 가장 처음 반겼다.

그러나 내 학창시절 별명이었던 단순,을 열창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친구들은
내 폭탄 파마 머리를 보는 순간 그대로 웃음바다로 변해버린다. --;
안정환 파마라고 우겨대는 내 이야기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로 왁자지껄 엄청난 소음을 쏟아내며 즐겨워 한다.
웃어대는 친구들이나 신기하다고 만져보는 친구들이 전혀 원망스럽지 않다.
동창이란 게 원래 그런 건가 보다.
나 또한 아들, 허리, 피펜 등 이름은 없고 오직 별명만이 기억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변화에 깜짝 놀라며 함께 즐거워 한다.



3.
친구들 중에서 96학번은 내가 유일했다.
96학년도 대학 입시에는 내신이 의무적으로 40%나 차지했었는데
애초에 내신이 안 좋았던 우리들이 96학번으로 대학을 입학하는 일은 거의 드믄 일이었다.
물론 내신 13등급에 명문대를 가는 신화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좋은 내신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지만 내신 좋았던 친구들은 죽자 살자 공부만 하던 친구들이기에 다소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역시 대개는 내신 40%의 의무가 풀린 97학년도 입시를 노리고 일부러 재수를 많이 하였었다.
나 역시도 재수를 결심하고 대입학원에 등록까지 했었으나
대학 좀 다녀본 후 재수를 하더라도 하자고 결심했던 게 결국 놀다 보니 그냥 쭉 다니게 된 꼴이었다.

덕분에 동년배가 모이면 보통 취업이 주된 화제가 되는 경우와는 달리
이 동창들 사이에서는 여자친구 얘기라든가 그간 삶의 이야기, 참석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의 또 다른 낭설들이 난무할 뿐이었다.



4.
남자들 사이에서의 분쟁에서 큰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다름 아닌 여자다.
이 날도 여자 두 명이 동석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물론 남학교였던 우리의 동창은 아니었지만 정당치 못한 자리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황당했을 건 그녀들이었겠다.
애초에 2대 2로 만난 자리가 갑작스레 반창회가 되어 버렸으니.

한 여자는 한 동창의 여자친구였기에 모두의 관심은 남은 한 여자로 휩쓸리게 된다.
게다가 이 여자아이가 오빠, 오빠 하면서 워낙 모두들에게 친하게 구는 지라 상황은 갈수록 깊어진다.
물론 내게도 교주님이라 부르며 팔짱을 끼는 건 예삿일에 은근슬쩍 안겨오기까지 한다.
난처하여 자리를 옮겨 남자애들 사이로 갔더니 갖은 질투의 눈빛이 느껴진다.

애초에 한 여자를 두고 총을 겨누는 서부극은 싫어하는 지라 여자에 대한 경쟁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강렬한 의욕을 느낀다.
학창시절 안양예고를 누비며 선전했던 곱상한 친구도 와 있었고,
대개의 우리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자엔 별 관심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최고의 매력남으로 손꼽던 친구도 와 있었던 터다.
이 친구들과 지난 7년 간 갈고 닦아온 내 공력을 한 번 시험해 보고픈 강렬한 욕망을 느꼈던 게다.

결국 문제는 터진다.
믿기지 않겠지만 별다른 공력의 발휘 없이도 나의 승리로 확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v
한 친구가 화장실에서 그녀에게 추행을 하고 만 게다.
그리고는 내게 한 번 따먹겠다고 이야기 한다.

아. 7년만에 만난 동창인데 이토록 불합리적인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 젠장.



5.
아주 유쾌하고 기분 좋은 자리였다.
동창들이 더 이상 나를 가지고 헛소문을 퍼트려대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은 아쉬움 남는 부분이긴 하지만
진한 추억들을 함께 한 친구들과 걱정 없이 옛 이야기를 회고하는 것은 삶의 커다란 행복함이었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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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