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유치한 출사표 (2003-05-28)

작성자  
   achor ( Hit: 1536 Vote: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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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이번 주 내내 빈둥빈둥 거리다가 처음으로 나선 곳은 수원의 학교다.
30일 마감인 졸업논문에 대해 정보를 주겠다고 하여 갔으나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이나 걸려 간 학교에서 들은 이야기는
고작해야 10여 분 여.

그저 신문방송학과 정보통신공학에 관련된 논문을 30일까지 제출하지 않는다면 졸업이 힘들다는
위기감만을 느끼고 돌아왔을 뿐이다.

경제학적인 효율을 항상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토록 비효율적인 일은 참기 어렵다.



2.
수원까지 다녀오며 그래도 남는 건 있어서
창 밖을 보며 내내 생각했다.
그리곤 쉽고, 간단하게 결정내렸다.

어쩌면 그 결정은 필연적으로 쉬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원인으로 이 갈등을 꼽고 있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동전을 던지는 운명의 선택까지도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3.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내 운명론에 대한 이야기는 몇 차례 들어봤을 줄 안다.
알다시피 나는 운명을 벗어나려는 의지마저도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운명론자.

그러나 과거 그토록 입에 달고 살던 운명론 이야기를 최근에는 그닥 말한 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 무의식 속에 잠재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4.
나는 내 운명을 별 것 없이 그저 그런 소시민으로 점지하고 있었다.
대단한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도 아니며, 만사를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해 버리는 습성을 갖고 있는 내게 있어서
소시민은 이의 없는 운명의 결과였다.

때로는 프로그래머를 하다가, 또 때로는 시민운동을 하다가,
어쩔 때는 신문기자가 되어보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바텐더가 되어보기도 하다가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결혼하여 그냥 그렇게 삶을 유지하는 그런 내 미래를 예언하고 있던 게다.

나는 그러한 나에 대한 예언이 시간이 흐를 수록 현실로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웠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절대적인 운명론을 갈수록 이야기 하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리라.

그런 생각들은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이를테면 45번까지밖에 없는 로또에서 잘못된 인쇄로 46번이 찍힌 카드를 들고 있는,
토요일이 되어도 결코 당첨될 수 없다는 숙명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한 주를 버티는 것과 같다.
곧 삶에 있어서 대박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삶에 대한 큰 희망도, 열정도 없을 것은 당연했다.



5.
그러나 만사에 반대급부는 있기 마련이라
내가 아무리 절대적 운명론자라 하더라도 그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반하는 마음 또한 슬며시 자리를 잡아간다.

정령 그렇고 그런 삶이 나의 숙명이라면
그것에 도전해 보고 싶은 오만객기는 나에게도 있다.

네가 그 어떤 神이든 절대권력자든 상관 없다.
나는 이미 네가 규정해 놓은 나의 운명에 반발해 보고 싶은 욕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6.
그리하여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미래를 예언한다.

그 한 가지는 내가 성공적으로 공부를 완수해 낸 후 나의 절대적 운명론에 대한 생각을 유아기적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공부하는 행위 또한 이것저것 해보다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 행동들의 한 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내 이 결심은 나의 운명을 거는, 건곤일척의 각오일 수밖에 없다.



7.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지는 않다.
내가 다른 공부하는 이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는 않는다.
나는 태생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주제 파악은 이미 완벽한 터다.

그러기에 각오와는 달리 행동에서는 건곤일척적이지 않다.

그저 공부를 조금 시도해볼 생각만 한다.



8.
지난 3월에도 나는 이 같은 갈등을 겪은 바 있다.
당시에는 어머니의 냉장고 덕택에 그 결정이 그래도 조금은 간단했었지만
그 속에서도 아쉬움은 있다.

만약 당시 냉장고는 어머니의 몫으로 넘기고, 나는 공부를 했었더라면
2-3달 흘러 있는 지금에 와서는 계속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만 할 것인가, 따위를 고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방안에 홀로 앉아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 너무 길었다.
결정할 수 없다면 직접 시행하고, 착실히 오류를 겪으며 몸으로 판단하는 방법을 이미 생각했어야 했다.



9.
아주 짧은 시간만에 돌아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차적으로는 31일에 있는 한문 졸업시험을 목표로 삼을 것이기에
이번 주말에 돌아오기 위하여 나는 지금 이토록 거창하게 이야기를 하는 꼴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 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리스크 없이는 성공도 없다는 것을 되새긴다.



10.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일종의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1등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항 없이 인정하기 시작했고,
사람들 앞에서 공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데에 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생각이 여물지 못했던 그 시절,
나는 공부로는 1등을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 속에서
가당치도 않는 문학이나 음악, 사상서를 찾았으리라.
그것들이 공부가 빠져버린 내 삶의 한 대안이었으리라.



11.
누구에게나 있을 젊은 날의 영광을 굳이 떠벌리려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 출사표를 던지는 내게 있어서 자신감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려는 것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 역시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다.
1등을 놓치면 내내 풀이 죽기도 하는, 그저 그런 모범생의 모습 또한 내 모습이었다.
수능시험에서 사법고시 합격 인원인 1000명 안에 들기도 했던 잠재된 합격자였단 말이다.

그 시절 나에게 짓밟혔던 인간들이 결국은 나를 짓밟고 있는 이 현실을 참아내지 말아야 한다.
남을 밟고 올라선다는, 신해철의 음악에서나 나올 법한 조롱은 이미 누군가를 밟고 있는 자들의 반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밟혀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것 대신 밟은 후 반성하는 쪽을 택하는 게 낫다는 걸 주지해야 한다.

자. 지금은 우등생이 되어 있는 옛 열등생에게
지금은 열등생이 되어 있는 옛 우등생의 참맛을 보여주도록 하자.



12.
아.
그런데 써 놓고 보니 좀 유치하긴 하다. --;

쩝. 어쩌리. --;

1999년 이후이니 근 4년만의 결합이다.
마치 패닉이 결합하는 것처럼 우리도 일시적으로 결합한다. --;

공부를 시도해볼 기간 동안 나는 정규네서 기거할 예정이다.
그 때까지 achor WEbs.는 empty다.

"삶을 이끌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야망을 펼칠 용기는 있는가?
짧고 덧없는 인생이라지만 누구보다도 멋지게 역사 속으로 뛰어들 자신이 있는가?"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84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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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thers2003-05-29 05:14:25
니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주의점이 있다. 첫째, 정규를 믿지 말 것. 둘째, 위렉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 셋째, 가끔씩 쳐들어오는 술취한 집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 -_-;
위의 과정을 훌륭하게 치뤄내기 바란다. 그럼.

 나2003-05-29 10:05:45
정규라는분..아처좀 잘 부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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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