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잡념 (200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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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570 Vote: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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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2005년, 29살의 설날을 곧 맞이해야만 하는 이 즈음,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요즘 들어 유년기,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배워온
작은 하나하나의 예절과 규범, 절차나 생활습관들이 새삼 대단하게 여겨지고 있고,
뭐 뻔한 그리움이긴 하다만
예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

이를테면 어머니로부터 이빨을 닦으라고 강요받던 그 아침의 기억들이나
언젠가의 크리스마스, 한 뮤지컬 공연 티켓을 사들고 와서 가자고 했던 여자친구의 기억들 같은 것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예전에도 게으르고, 외출을 싫어하였기에
여행이나 공연 문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나를 애인으로 선택했던 여자들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나오듯이 남성이 준비한 깜짝 선물로 함께 근사한 공연을 보는 대신
스스로 티겟을 준비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는 이런 점들이 각 시절 내 애인이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꽤나 미안한 일로 느껴진다.

얼마 전 나는 교제하자는 프로포즈를 받은 적이 있는데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난 몇 년간 누군가 사귀게 된다면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결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결혼하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게으르다.


어쨌든.
가정에서의 생활습관과 내 삶 속에서 게으른 모습은
언뜻 보기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내 몸 속 깊이 뿌리내려진 생활습관들은
많은 부분 내 유년시절의 가정에서 형성되어 왔을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내 게으름에는 일정 부분 내 부모님의 책임이 있지는 않을까.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탓하려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나는 내 부모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단지 사실을 규명하려는 것뿐.

생각해 보면 나는 학창시절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등교하던 고등학생 시절엔
지각도 엄청 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개 아침 일찍 일어났었고,
또 오히려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약간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역시 사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게으르게 빈둥대면서도
타인에 의해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에 대해서는 좀 민감하게 반응하는 면이 있긴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게으름은
스무 살 독립 이후 나 스스로 만들어 낸 생활습관일 수도 있겠고,
이 경우 내 부모님은 내 게으름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또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잠재된 욕망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즉 또 하나의 가설은
내가 학창시절에 너무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이 분주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을 무의식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현실화 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게다.

그렇다면 내 부모님은
나를 너무도 부지런하게 닥달하셨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이 가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나는 학창시절에 너무 부지런한 건 결코 아니었다는 점. --;
당시 적어도 부지런함에 있어서 만큼은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지도 않았고, 덜 부지런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상태였던 것 같다.
나 스스로의 부지런함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건
별다른 화제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내 부지런함 혹은 게으름은 특별하지 않았다는 반증.


다른 가설을 들어 보자.
이번엔 답습과 관한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은 가정에서의 것들이 거의 절대적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내 생활습관은
내 부모님의 모습을 답습하였을 가능성도 아주 크다.

다시 말하자면
내 부모님이 나를 적당히 근면 성실하게 키우셨다 하여도
부모님 자신은 근면 성실하지 못하였기에
나는 근면 성실하게 행동하고 있다 해도
부모님의 모습에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가.
내 어머니는 바쁘실 때도, 또 바쁘지 않으실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아버지만큼은 바쁘셨던 것이 확실하다.
아버지의 삶이 근면 성실했는지는 나로서 알 수 없지만
가정에 별 문제를 일으키신 적이 없으시고,
또 항상 아침 일찍 출근하시고, 저녁 늦게 퇴근하시던 모습은 바쁘셨다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다.

물론 아버지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바쁘신 건 아니었다.
공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놀러갈 수 있었고,
여름 휴가엔 강과 들, 산과 바다를 찾아 멋진 여행의 기억을 내게 남겨주신 분이셨기에

결국 이 또한 내 부지런함에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결코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왜 게으르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게으르긴 게으르단 말인가?
다른 어떤 내적인 문제를 단지 게으름이란 단어로 고착화 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왜 싱숭생숭한 기분 속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은 내 게으름을 생각하고 있는가?
유년기에 대한 향수과 옛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잊혀진 것인가?

에라이.
나는 제정신이란 말인가?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235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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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