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무렵이면 문득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여기 이렇게
가만히 서있다 보면 추억의 사람들이 왕왕 찾아와 엇갈린 인
연을 만들곤 한다.
내가 東邪西毒을 좋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황량한 사
막의 외딴 여관 속에서 이런저런 사연이 얽힌 사람들이 오가
며 어느덧 흘러버린 4년이란 시간들...
이제는 여고생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아이에게 아직
여고생 말고 다른 명칭을 찾아줄 수 없다. 힘든 일이다. 그
교복 입은 풋풋한 이미지에서 늘씬한 미녀의 몸매를 연상해
내는 것은. 그런데 시간은 이미 흘러버렸다. 시간에 저항하
는 건 의미 없다.
1996년에 처음 알게 됐으니 벌써 4년이나 흘러버린 게다.
그때 난 갖가지 설렘으로 가득 찬 대학교 신입생이었고, 그
아이는 한참 힘들어야할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남겨진 기억은, 이과를 가려고 노량진에 있는 학원을 다니
던 시절 가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그 아이에게 연락했던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별볼일 없는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다.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그 아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아
이는 그렇게 1년에 한두 번 연락하면서 나 알아?,로 첫마디
를 시작한다.
"물론이지. 정말 오랜만인걸."
"응. 잘 살아?"
"그럭저럭. 넌 어때?"
근황을 물으며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균형이 잡혀있다.
"우리 한 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그 아이는 침묵한다.
나도 침묵한다. 아무 때나 보채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으
면 저절로 되는 일이 있다.
"아, 미안. 벌레 한 마리 잡고 오느라고.", 역시 터프 하
다. 그 아이는 바퀴벌레 한 마리에 몸을 떠는 뭇여자들관 다
르다. 맨손으로 내리쳐 죽어버리곤 손바닥에 묻은 바퀴벌레
내장액을 쓰윽 혓바닥으로 핥을만한 아이다.
"글세,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낫겠어."
"그래... 그런데 왜?"
"어쩐지 그래야할 것 같아."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은 여전히 통용된다. 정말 그렇
다. 처음에 어떻게 관계가 맺어지느냐는 앞으로의 진로를 좌
지우지한다. 처음 쉽게 만나지 못했다면 그 벽은 쌓이고 쌓
여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가볍게
만나는 것이 그렇게 가벼운 것만은 아닌 게다. 아니면 평생
무거움 속에서 짓눌려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
나 역시 그 아이의 모습이 궁금하긴 하지만 참을만 하다.
그런 불안함은 나도 갖고 있는 게다. 얼굴 모른 채 정을 쌓
아오다가 직접 만나 그간의 공든 탑이 모조리 무너트리는
일. 그 불안함은 내게도, 그 아이에게도 상주하고 있다.
그 아이는 또 언제 훌쩍 떠나버릴련지 모른다. 항상 그래
왔다. 아무때나 슬쩍 다가와서는 푹 기대어 있다가 정이 들
만하면 아무말 없이 사라져버리기. 등대지기,란 초등학교 시
절의 동요가 문득 생각난다.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
람을...
東邪西毒은 우릴 위해 따뜻한 끝마디까지 남겨두었다.
떠난 후에 그 가치를 안다...
여름이 다 지난 이제서야 슬슬 허물이 벗겨지는 내 어깨를
보며 여름이 다 지난 후에 그 가치를 안다,고 말하며 그리움
을 토로하는 건 조금 우습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