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의 전기장판 (2005-10-18)

작성자  
   achor ( Hit: 3256 Vote: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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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지난 밤 잠을 자러 침대에 누웠을 때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져 왔다.
뉴스에서 봤던 기상캐스터의 말처럼
가을도 없이, 엊그제가 여름 같기만 한데 벌써 겨울의 한기가 스믈스믈 새겨든다.

그 한기는 나로 하여금 침대에 깔려 있는 전기장판을 생각하게 했다.
지난 1년간 그렇게 깔려 있었으면서도 단 한 번 이상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 장판 말이다.

결국 전기장판은
무더웠던 그 여름날에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1년을 버텨낸 채
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새삼 주변의 많은 지난 겨울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책상 의자에 널부러져 있는 옷들은
역시 두말할 나위 없는 지난 겨울에 입던 옷들이다. --;
이제 외출을 하게 될 때면 그 헝클어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가면 된다.
겨울 옷을 새로 꺼내고, 여름 옷을 다시 넣어두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깔끔하게 옛 흔적을 정리해 두든 말든
시간은 필연적으로 흘러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주었다.



2.
그러고 보면 버티는 일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는 것도 같다.

MBC TV에서 방송하는 만원의 행복,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만원으로 연예인이 1주일을 버티는 모습이 나오는데
물론 TV 연예가 스포츠는 아니기에 치열할 까닭도 없고, 오히려 적당히 당해주는 시늉을 함으로써 재미를 줘야겠지만
어쨌든 나라면 정말 잘 해낼 것만 같다.

안 먹고 버티는 것, 정말이지 자신 있다. --;

헝클어진 상태로 무언가 그저 놔두는 일,
그것을 버텨내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만 같다.
그것이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희노애락에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3.
그간 나는 내 스스로 너무 과거에 연연해 있는 건 아닌지
다소간의 걱정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곳에 간간히 적어오던 다이어리의 내용 역시 지난 향수에 관한 것들이 많았던 것처럼
너무도 만족스러웠던 지난 날을 나는 많이 그리워 했던 것 같다.

그것들은 내게 작은 걱정거리였다.
모두가 미래지향적으로, 생산적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을 때
나만 홀로 추억에 사로잡혀 퇴보해 가는 건 아닌지 염려됐던 게다.

하지만 오늘
1년이나 아무 일 없다는 듯 버텨낸 전기장판을 보며 깨달았다.

굳이 정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리하거나 정돈하지 않고 헝클어진 채로 놔둔다 해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나는 오늘 깨달았다.

내게 소중한 옛 추억들이 있다면
굳이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고, 굳이 미래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냥 그대로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한낱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의 의지는 결국 소박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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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oob2005-12-19 00:41:48
여기는 만엔을 가지고 한달동안 생활하는 프로가 있어.
물론 전기세 수도세 등의 공과금 포함이야.
아처라면 해낼 수 있을거란 생각을 나도 잠시는 했어.
근데 문제는, 하루 세끼 여러가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게 관건이야.
힘들겠지?? --;

 achor2005-12-19 18:39:07
지난 2002년 나는 홀로 일본에서 근 한 달을 살아간 적이 있잖냐. 그 때도 물론 자알~ 살았었지. 음식은 근처 편의점에서 값싼 것들로 대충 때웠고, 잠시간의 체류였던 만큼 공과금은 낼 필요는 없었고... 특별히 누구를 만나 맛난 것을 먹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닥 돈 쓸 일도 없었던 것 같아.

이 다이어리를 쓰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의 만원의 행복이란 프로그램도 알고 보니 그냥 굶는 것은 안 된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역시 나로서는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다만, 그렇지만 아주 특별한 미식이든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라면이든 먹는 건 그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뭐 성공해 낼 것도 같고.

 ggoob2005-12-19 23:14:14
나이가 30이 넘고 또 35가 넘고.. 하면 체력이 딸림을 확확~ 느끼게 된대.
아직 20대니까 잘 먹어. 근육도 없는게,..--

 achor2005-12-20 02:21:56
내 비록 늘씬한 몸매 유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만 아직도 니가 모르고 있구나. 그 늘씬한 몸매를 이루고 있는 군살 전혀 없는 근육질의 조화를.

 achor Empire2006-09-28 11:39:36
가로등은 매일 아침 꺼진다
1. 노래방에서 나오니 5시 50분 남짓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 시간이면 이미 대낮처럼 환했는데 어느덧 벌써 시월이라고 아직 좀 어둡다. 이런저런 인사치레를 마치고 집 근방에 도착하니 6시 5분 즈음. 고작해야 15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세상...

 achor Empire2015-12-03 08:39:37
눈 온 아침의 정원
아침에 잠깐 내린 눈이 소폭히 쌓여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눈 내린 아침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순간 너무도 잘 닦여 있는 인도가 놀라웠다. 자연발생적으로 눈이 인도에만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닐 터. 누군가가 아침부터 저걸 치우고 있었겠구나......

 achor2024-04-06 11:39:22
우연히, 랜덤하게 노출된 옛 글을 보며...
나는 정말이지 버티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같다. 특히 인간의 희노애락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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