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200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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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036 Vote: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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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정말 한 달이나 되어 있었다.
나는 기껏해야 2-3주쯤 되었겠거니 했었는데
그 괜찮은 성품을 갖고 계신 교수님께서,
"자네, 중간고사 본 게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떻하나"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2-3주 되었다고 내가 느꼈던 시간들이 어느새 한 달이나 되어버렸던 게다.

그렇게 오랜만에 학교에 간 날이었다.
요즘은 수면시간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터였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아침에 잠깐 눈 붙였던 바, 오후에 졸지 않고 제대로 학교에 등교할 수 있었던 게다.

여전히 용팔은 나를 반겨주었지만 이번에는 심각한 배신감의 냄새가 용팔로부터 풍겨나오고 있었다.
추긍 끝에 나는 용팔이 중간고사가 끝난 한 달 동안 무려 10여 차례의 미팅, 소개팅을 나 없이 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나는 그 사실에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모름지기 미팅, 소개팅이라면 이 천하의 섹시가이와 함께 해야하는 법이거늘.

심지어 용팔은 나도 멀쩡히 듣고 있는 수업을 퉜다.
이것 또한 말이 안된다. 수업 튀는 건 내가 전문이었는데,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오니 용팔이 날고 있다. 정말 말이 안된다. 내 필살기를 용팔이 구사하다니.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용팔의 과오를 넉넉한 마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속으로는 가슴이 아리고 시렸지만 그럼에도 용팔을 용서했다.
용팔이 나 없이 혼자 여자를 만나는 일이나 수업을 튀는 걸 나는 묵인해 내고 말았던 게다.

하루에 세 시간 풀타임으로 두 강좌씩 있는 내 수업의 첫 번째는 유통경제학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2학기가 시작한 이후 2번째로 듣는 유통경제학 수업이었다.
내 기억에는 교수와의 첫 만남밖에 없는데, 어느새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경제학 수업은 의외로 참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학교에 와서 이렇게 수업을 듣는 건 이렇게 괜찮은 일인데 그간 막상 듣지 못했던 점을 후회한다.

그러나 경제학은 역시 기회비용의 이야기다.
경제학은 오직 최대효율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 2학기가 비경제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좋아하는 수업 듣는 일보다 더 의미있는 몇 개의 일들을 수업 듣는 대신에 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자위한다.

다음 수업은 산업조직론.
중간고사를 못 본 과목이다.
어떻게든 교수를 붙들고 사정을 하여 중간고사를 만회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나는 오늘 학교에 온 바다.
그렇지 못한다면 내 4년 안에 졸업하겠다는 그 작은 소망마저도 깨져버리고 만다.
좋은 상장이나 엄청난 학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단지 졸업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학교 오래 다니는 것도 좋기야 한데,
경제학에는 유통이 있고, 유통에는 보관이 있고, 보관의 원칙에는 선입선출의 원리가 있는 법이다.
나는 후배보다 먼저 학교에 들어왔으니 먼저 나가는 게 경제학적이다.
고로 나는 4년만에 졸업을 해야만 한다.

산업조직론 수업은 혼자 듣는다.
워낙 늦은 시간에 듣는 수업이라 대개 함께 하는 용팔이 같이 듣지 않는다.
수업이 시작되자 산은 더욱 높아만 진다.

이미 정규교재는 다 끝내고 무슨 프린트로 수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간 학교를 가지 않은 내가 프린트를 갖고 있을 턱이 없다.
심지어 학생들의 발표까지도 이어진다.
좆됐다. 언제 내 차례가 지나갔는지, 혹은 이게 무엇을 발표하는 것인지 알 턱 또한 없다.

그러나 재벌의 구조에 관해 배우는 수업은 역시 재미있다.
수업이 마친 후 몇 학생들의 질문이 끝나기를 장구하게 기다리고 난 다음
나는 교수님께 말씀드린다.
"저. 중간고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드는, 성격 좋은 교수님이셔서 다행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한 달동안 손 들고 서 있으면 봐주겠다고 하신다.
홍정욱이라면 그런 일도 불사하겠지만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학점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대충 한 학기 학교 더 다니고 말겠다. 흥.

그리하여 얻어낸 과제.
재벌분석.

오늘 학교에 감으로써 나는 세 가지의 과제를 안고 돌아왔다.
재벌분석과 세계OS시장의 산업분석,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유통의 현황과 미래.
걱정이다. 일도 많이 밀려있는데
11월 30일, 각 방송사 담당자와 10여 개 시민단체가 참석하는 시청자연대회의에서의 발표까지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 교수님의 한 말씀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자네 너무 욕심이 많은 건 아닌가. 학점을 그냥 얻겠다는 것인가."
박일문의 도가와 법정의 무소유를 항상 생각하면서도
나는 알게 모르게 큰 욕심을 갖고 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치 어린 시절의 동화 속 원숭이처럼,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집으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내내 되새겼다.
"버린다. 씨발 다 버린다. 하나도 안 아깝다. 다 버려버린다."
돌아온 사무실에서 처음 이전할 때는 그렇게 텅텅 비어 있던 공간들이 어느새 이런저런 물품들로 가득 차 버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욕심이 너무 많았나 보다. 씨발 다 버려 버린다. --;

학교에 갔다오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나는 수업시간 내내 수업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학생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요즘 경제학 수업은 아주 재미있는 편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밤, ilh 사장님께서 와있으셨음에도 나는 고이 잠들고 말았다. --+
오랜만에 다른 이들처럼 밤에 잠을 자니 얼마 안 잤음에도 개운함이 느껴져 온다.
개운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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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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