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친구는 사람들 때문에 더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더구나.
또 어떤 친구는 남자로부터 심각한 배신을 당해 두문불출, 상처입고 우울해 하고 있고.
고령에 아프신 부모님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졸업한 지 한참이 되었어도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져있는 친구 등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있고,
또 나 역시 돈 7,000원이 없어서 신용불량자가 될 뻔 한 게 어제 이야기다.
누구나 한 두 가지 심각한 문제 정도는 안고 살아가야 되는 게 세상인가 보더라.
나는 대체적으로 터무니 없이 게으르고 나태하여
미리 행동했다면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내버려 두어 후에 후회하면서 고생하는 편이다만
가슴 한 편에는 자신감이랄까, 혹은 오기랄까 하는 것이 있다.
어차피 태어난 거 어떻게든 결론은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는 말,
죽음은 한 켠에서 언제나 삶을 지긋히 바라보고 있다는 말,
이런 말들은 내 자신감 혹은 오기의 원천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꽤나 애를 쓰는 편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내 삶의 희망이다.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큰 힘이 된다.
나는 슬프거나 괴롭거나 무섭거나 고통스러울 때
고.작.해.야.죽.는.거.다.라고 내게 이야기한다.
나는 죽음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 알고 있다.
죽음은 고통도, 부활도, 윤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웃기지 마라.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천당이나 지옥, 극락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죽음은 모든 상황의 종료를 이야기할 뿐이다.
아무리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사후는 없다.
오직 자신의 이름이 남길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것이 다름아닌 명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언젠가는 누구나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체감할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려우리.
미친듯이 살고픈대로 살면서 삶의 쌩쇼를 하면 되는 게다.
자신을 혹사시켜 가면서 한 번 사는 삶, 정말 잘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삶, 대충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이나 해가면서 살고 싶다면 그러면 되는 게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썅, 이런 일도 있네 하며 대충 맞닥들여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썅, 못 하겠다 하는 되는 것이고,
겸허히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면 되는 게다.
인간들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네게 죽음을 요구한다면 까짓거 죽어주면 되는 것이고,
평생동안 철창안에 갇아두려 한다면 갇혀 있든가 죽어버리든가 하면 되는 것이다.
자. 무엇이 두려우리.
어차피 결론은 누구나가 죽음인데 세상의 온갖 기쁨과 고통은 한 번쯤 다 느껴보는 것도
그 한 번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지 않겠느뇨.
자. 무엇이 두려우리.
다만 죽음에 있어서 한 가지 부담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나는 내 부모님 생전에 자살하여 부모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고,
내가 결혼한 후, 자식을 낳은 후 자살하여 내 가족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에 자신이 있기 전까지는 결혼이든 자식이든 관심 없다.
오직 그것만이 내 죽음의 치명적인 부담이다.
그 외의 모든 문제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희망,
자신감 혹은 오기로 나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7,000원 없다고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고 싶어한다면
해랴, 썅. 어쩌라고. 마음대로 해라. 썅.
한 번 외쳐보기를.
썅.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내 길대로 간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고.
죽음이 나의 편인 한 나는 궁극적이다. 곧 아무 것도 내게는 심각할 수 없다.
삶에서 삶을 종결짓는 죽음보다 더 궁극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느꼈을 지 모르겠다만 나의 절대적인 운명론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만들어낸 내 자율의지가 실체이고
명예욕은
죽음에 대한 준비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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