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이프, 혹시라도... (2010-02-03)

작성자  
   achor ( Hit: 3328 Vote: 8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작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처음 접했었다.
출근길에 가끔 듣곤 했던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그들의 대표쯤 되어 보이는 인물이 출연하여
낙태에 대한 그들의 소신을 밝혔던 게다.

뭐 자신의 소신이 있을 수 있고, 이를 공표하는 게 문제될 건 없겠으나
기어이 현행법을 동원하여 행동에 나선 것은 문제될 만 했다.

프로라이프란 이름으로 변신한 그들은 오늘
불법적인 낙태시술을 한 산부인과 3곳을 검찰 고발했다.


일단 현행법상 불법임은 인정하자.
위법이 당연하게 용인되거나 묵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인정하자.
다만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이라면 개선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자.

법은 사회 구성원간의 동의가 이루어진 최소한의 룰로서
그저 사회적인 약속이지 절대적인 신의 진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구성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낙태 금지 규정은 절대 사회적인 동의에 미흡하다.
현실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범죄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법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육아문제 자체도 쉽지 않지만
어쩌면 한 개인, 더 나아가 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채 훼손할 수 있는 사항을
사회적인 보호 장치도 전혀 없이
임신을 했다면 무조건 낳으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프로라이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현행법 이상의 윤리 수준이다.
청소년 미혼모의 임신 뿐만 아니라
강간이나 성폭행 등 산모의 의사와 상관 없는 임신까지도 출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한다.
낙태 시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퍼지면
피임에 더욱 신경 쓰게 되어 낙태가 결국 줄 것이고.

설령 그들 말대로 사람들이 처벌이 두려워 피임을 신경 쓰고, 그로 인해 낙태가 줄었다 한들
피임기구의 결함 등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임신했을 경우에도
범죄자와 미혼모, 둘 중에서 양자택일 해야만 하는 게 좋은 사회란 말인가.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나 역시도 갈등했었다.

먹고 살 공간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 속에서
육아를 한다는 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도 아닐 뿐더러
부모가 된다는 건 심신의 준비도 필요함이 당연하다.
그냥 국가에서 하란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하여 피임을 하되
자칫 실수라도 한 번 했을 경우엔 범죄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된 사회란 말인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때 부모가 되어 제대로 키우고,
내 삶의 질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출산조차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그로 인해 국가에서 출산을 강요한다는 건 너무 과도한 일이 분명하다.
태아의 권리도 일면 인정할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내 삶의 질과 밀접하게 관련된 출산만큼은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관계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혹시 종교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 지 의심하게 된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혹 그렇다면,
이는 종교의 강요와 다름 없어진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일시적으로 잘못된 법률의 힘을 빌려 타인에게 강요하는 꼴이 된다.

낙태에 관해서는 아직 현행법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보다 더 사회적인 합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혹시라도 너희의 교리서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고 해서
그것을 세상에 강요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착각하지 말 길 바란다.
그저 너희만 너희가 믿는 교리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사회는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공통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거라.

네 신은 그저 네 신일 뿐이다.

- achor


본문 내용은 5,40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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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감2010-03-07 10:01:15
심야토론에서 최안나씨가 강간으로 인해 임신된 아이도 이유불문하고 태아의 생명존중이라는 입장에서 낳는 것을 지향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 경악했습니다. 본인이나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해서 임신을 한다면 기쁘게 모성을 발현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강간 당하고 아이를 출산한다면 그 피해자는 아마 정신병 걸리지 않을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achor2010-03-08 01:14:18
이 글을 쓴 후 한 통계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 조사한 것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 자료에 의하면 강압적인 낙태 금지에 반대하는 쪽보다는 찬성하는 쪽이 더 많긴 하더군요. 물론 어느 쪽이든 가반수를 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통계 자료를 보며, 제가 잘못된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비록 소수가 될 지라도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법률이란 이름으로 더 큰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감싸안을 수 있는 사회야 말로 제대로 된 사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여성에게 법률의 힘으로 무조건 출산하라고 강요하는 건 가반수를 넘는 의견이 된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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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