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몇 년 간 나는 줄곧 짧은 머리를 고수하고 있는데
일단 일상에서는 편함이 있긴 하다, 머리 감은 후 굳이 인위적으로 말리지 않더라도 자연건조 되는 측면에서.
반면 자주, 누군가에겐 한 달에 한 번이란 숫자를 자주라고 표현하지 않기도 하겠지만, 깎아야 하는 것은 귀찮음이다.
아무튼 통상 나는 집 앞 저가 남성 미용실의 대표격인 블루클럽, 혹은 그 아류인 곳에서 머리를 깎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아내가 좀 좋은 곳에서 깎으라며 거듭 제안한 까닭에
추천 받은, 동네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곳을 찾아 나섰다.
역 앞 새로 생긴 건물 2층에 위치한 그곳에 들어서니 일단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이 눈에 띈다.
잠시 후 말끔하게 포멀한 의상을 입은 남자 직원이 다가와
이름, 생년월일, 연락처 등 개인신상을 물은 후 커트 비용을 알려주고 떠나갔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보여요, 혹은 다 깎고 나서 비싸다고 말할 거면 지금 가버려요,
내 추레한 행색 때문에 굳이 내게 말한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저 그들의 절차일 뿐, 아마도. -__-;
그가 말한 커트 비용은 블루클럽, 혹은 그 아류에 비해 몇 배나 비쌌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은 내 표정을 확인한 그는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내 머리를 감겨 주곤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곤 포멀한 의상을 입은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 원하는 스타일을 묻는다.
그냥 짧게 깎아 주세요,
고작해야 헤어스타일 정도 어떻게 된다해도 당신을 고소하지는 않을 테니 그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요,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가 알아차렸을 리는 만무해 보인다.
통상 블루클럽, 혹은 그 아류에선 무엇을 말하든 아줌마 마음대로다.
원체 별다른 기대가 없기도 하겠지만
뭐 또 특별히 내 기대와 어긋난 스타일이 된다해도 굳이 말하지 않는 편이고,
설령 말을 한다 해도, 그래요? 뭐 비슷해 보이는구먼, 정도로 퉁쳐지는 것이 예사기에
원하는 스타일을 말하는 것에 익숙치 못했다.
포멀한 그는 연신 가위질을 해댄다.
통상 블루클럽, 혹은 그 아류에선 소위 바리깡,이라 불리는 전동식 기계로 단 몇 분만에 쓱싹 해치우는 일을
그는 몇 배나 되는 시간과 노력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짧은 머리를 깎는 데에 전동식 기계를 쓰든 심혈을 다한 가위질이든 엄청난 차이를 낼 부분은 크지 않았다.
물론 무감각한 내가 아니라 어떤 누군가는 그 엄청난 디테일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만.
그러나 적어도 내겐 서비스의 과잉이었다.
시간의 낭비였고, 불합리한 소비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대우를 받는 느낌이 있었고, 그것이 결코 불편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들의 과잉 친절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그저 머리를 깎는 게 본질이었을 뿐.
덕분에 몇 가지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됐다.
1. 쉽게 말하자면 애플의 감성 보다는 구글의 효율성이 내겐 보다 의미 있는 가치라는 것, 하나
2. 없이 살아 대우 받는 것에 익숙치 않다는 것, 그러나 누군가의 인공적인 미소를 행복으로 여기지 않는 내 자신이 다행이라는 것, 둘
3. 디테일이 필요할 만큼 의미 있는 자리가 있다면 디테일을 챙겨주는 미용실을 와야겠다는 것, 셋
집에 돌아와 JTBC 송곳을 즐겁게 보았다.
깨끗하지 않은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싸우는 것이나 달리기에서 졌다고 벌해선 안 된다는 것,
새삼 느끼는 깨달음이었다.
용기만 있고 공포를 모르는 군인은 엉뚱한 전투에서 죽는다는 말도 인상 깊었지만
이가 가장 교활한 형태의 체제수호자라는 말도 매우 인사이트 있었다.
문득 엄청난 부자가 됐지만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던 개츠비가 떠올랐다.
- ach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