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3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 (1997-08-26)

작성자  
   achor ( Hit: 1381 Vote: 4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문화일기


『칼사사 게시판』 23676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3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                 
 올린이:achor   (권아처  )    97/08/26 01:29    읽음: 37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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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관심으로 난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를 읽어냈다.
좋아하는 소설은 잠자리에 들기 전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조금씩 읽으면서 오랫동안 감동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목표가 있던 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박일문은 오직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서였다.
그가 문청을 통해 "작가는 오 년에 한 작품 정도만 쓰면 돼요"라고
말했듯이 그는 다작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를 통해
이전까지 알고 있던 바보다 월등히 많은 그의 생각들을 알 수 있었다.

왕가위의 '동사서독'처럼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처럼 운동권의 얘기 뿐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있는 섹스나 생태학, 불교, 현재의 삶을 적어나갔다.

난 자신을 희생했던 80년대 운동권들의 현재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유치장에서 만났던 한총련 투쟁국장에게 난 물었었다.
혹시 운동권들의 현재의 삶을 다룬 책을 아느냐고...
그 사람은 모른다고 했었다.
그렇게 관심이 있던 책을
이렇게 우연히 좋아하는 작가로부터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 소설로 인하여 그가 내게 끼친 영향은 많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서구문명의 환상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접해온 서구의 역사와 문화는
나도 모르게 나를 그들의 환상에 빠트려 놓고 있었다.

왠지 서구적인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였고,
그들의 문화는 진정한 아름다움처럼 느껴졌었다.

종교에서도 난 비록 무교였지만 서구적인 기독교 영향으로
불교나 도교 등 동양적인 것들을 소외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욱 문제였던 것은
내 편견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나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보다는 과연 사회주의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많은 지식인들을 몰입시켰는가가 난 궁금하였었다.
고작해서 '공산당선언' 정도나 스쳐 본 것밖에 없는 나였지만
실천없는 이론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탐구해 보고 싶기는 하였다.

그 마음 속의 막연한 바램을 좀더 현실적으로 실천하게끔 이책은 도와줬다.

박일문의 사진을 보면 상당히 '순진한 사람이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0대 중반일 것임에도 모습은 순수한 20대의 청년같은데
소설에 드러난 그의 섹스묘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인물들을 통해 말을 한다.
요즘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은 섹스에 대해 비겁하다고...
그런 것들이 모두 문화에서 오는 편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속받는 결혼보다는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했다.
누군가를 책임져야하고, 삶의 업을 만들어가는 결혼은
방랑자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적 관념의 구속보다는
신석기 시대 이전에 행하여졌던 혈족 내 집단적 난혼이나 잡혼,
동일 씨족 내 형제 자매의 성교를 금하는 푸날레아혼 등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평범하게 결혼한 사람들이 드물고,
대부분이 동거와 강간, 여자를 사는 것들로 성욕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것들을 통해 난 이제 완전히 결혼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내 사고에 이유없는 당위성마저 느끼게 되었다.

난 변해버린 대학가 문화도 생각할 수 있었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조명등, 록 카페에서 울려 나오는 헤비메틀의 기계음들,
이른바 대학가는 불야성이었고 라스베가스였다.
무스를 바르거나 금 목걸이를 한 대학생들이
천박하고 척박한 자본의 식민지, 대학가 앞에서
몸을 건들거리며 흘러다녔다.
한때는 저항 문화가 살아 있었던 곳,
이제는 완벽하게 자본을 앞세운 대중 문화에 잠식당해,
대학가는 문화의 슬럼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 구내 어디든 안정감 없이 들떠 있었다.
대학이란 나름의 청년 공동체 문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차를 몰고 다니거나, 남들보다 좀 잘살거나 하면,
어딘가 좀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런 것이
대학의 공동체 문화 의식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청년 문화란 그곳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캠퍼스에서 자동차가 질주하고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아무 곳에나 버려졌다.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싫어, 좋아, 아니, 미워, 웬 파마, 웬 좋은 날씨,
하는 식의 톡톡 튀는 말투였다.
공부할 땐, 죽을똥 살똥 모르게, 놀 때는 날라리로.
그것이 그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운동밖에 모르던 시절에는 스키, 볼링, 골프 따위는
부르주아의 산물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300원짜리 막걸리와 민중가요, 그리고 대화가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어느 새 대학가는 완전히 변해 버렸으며,
많은 이질적인 문화가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길거리를 가다가 오늘 사버린 내 팔지와 반지를 보며
난 과연 어떤 문화에 휩쓸려 살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비록 80년대의 대학가를 꿈꾸긴 하지만
변질된 90년대의 대학가를 외면할 만큼 난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난 충분히 대학의 다원화를 인정하고 싶다.
살고 싶은 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거다.

많은 운동권들은 그 방향을 불교나 생태학으로 돌린 듯 싶다.
레닌주의가 갖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거기에서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생태학 역시 내게 어떤 흥미도 줄 수는 없었다.
내게 있어선 현재의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중요했고,
미래는 '난 모른다'라는 식의 태도였다.
적어도 함께 소멸되는 것이 억울하지는 않으니
현재에 닥칠지도 모르는 생태학적 재난 역시 '난 모른다'였다.

자연이 어떻고, 분리수거가 어떻고... 이런 식의 삶을 살기엔
내 머리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워져 있다.
그냥 대충대충 살고 말겠다.

결국 두명의 삶이 자살을 택했다.
30세를 넘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장수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진수란 인물은 나와 연줄이 닿은 인물이었다.
그는 내가 있던 영등포구치소 11상5방에 있었다.
반가웠다.

다들 상처를 안고 살아갔다.
그는 항상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얘기했었다.
그랬나 보다.
살아남은 80년대 운동권들은 항상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비겁했다는 감정이 들었나 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부심을 갖어야만 했다.
이미 타인들로부터 시대가 지났다라고 단정지어진 것들에
모든 것을 몰입하였던 그들이 살아나갈 힘은 거기에 있었다.

사랑은 보상없이 기다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잊어버린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일으켜 주었다.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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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