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피어나는... (2002-10-22)

작성자  
   achor ( Hit: 802 Vote: 1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내내 잠을 안 자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로 참은 건 아니었고, 지난 주말 많이 자놨더니 별로 잠이 오질 않았다.
적절한 리듬을 찾지 못해 지정된 시간에 꼭 가야하는 학교를 또 다시 못 갈까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누우면 바로 잠들 것을 알면서도
버틸 수 있는 상태에서 잠자리에 드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 여자아이는 운이 좋았다.

나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침에 내게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침에는 대개 내가 자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그런 사정 모를 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침에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운 좋게도 오늘만큼은 아침에 살아있었다.

그녀가 아침에 전화를 했다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에도 그녀는 내게 아침에 연락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내 잃어버린 핸드폰의 소재를 말해주었다.
내 핸드폰을 주은 사람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 중에서 그녀를 선택하여 연락을 했다고 했다.
당시 일 때문에 받아야할 전화들이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아침 연락은 그래서 나를 아주 기쁘게 했었다.
나는 이번 또한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며 핸드폰을 순간 찾았었지만
핸드폰은 내 귀 밑에 있던 중이었다. --+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울먹거림이 있었다.
오랫만에 전화하여 아침부터 울먹거리다니, 무언가 일이 있긴 한가 보다!
무슨 일이냐는 내 질문에 그녀의 대답인 즉슨. --;

아침 7시 남짓, 오랫만에 전화하여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늘어놓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아. 수위가 너무 높아져서 수정해 놓는다. 어쨌든 아주 황당한 이야기였다. --;)

그러나 연이어 늘어놓는 이야기는 또 다시 나의 염장을 긁어 놓는다. --+
어제가 남자친구랑 200일이었다고 자랑이다.
그래서 선물이라도 달란 얘긴가. 끙. --;

좋다. 마음대로 하거라.
그간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라도 행복하게 살아가라.
치사한 것. 누가 뭐래냐. 나희씨와 소개팅이라도 한 번 해주고 자랑할 것이지. --+

비록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 더욱 비참하게 하는 전화였지만
오랫만에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피곤함이 싹 가셨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오늘의 비극은 이게 끝인지만 알고 있었던 게다.

그러나 비극은 계속된다.

요즘이 중간고사 기간이란다.
나는 여전히 공부하지 않아 그냥 넘길까 하고 있는데, 오히려 친구들이 내 시험을 더욱 걱정해 준다.
아. 안다. 그게 진심어린 걱정이라기 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인사말이라는 건. 죽일 놈들. --;

어쨌든 중간고사라고 하여 시험을 안 보는 수업만 강의를 들을 계획을 했다.
다소 어폐가 있는 말 같지만 따져보면 당연한 말이다.
공부를 안 한 내가 중간고사를 잘 볼 턱이 없으니 시험은 일단 보지 않은 채 후에 교수님과 담판을 짓고,
그 외 시험을 안 보는 수업들은 좀 열심히 다닐 생각이었던 게다.

학교로 출발했던 오후 2시 경은 내가 꼬박 24시간을 버텨내고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은 꽤나 피곤했었다.
평소 같으면 학교 가는 것 대신 내일을 위해 잠을 잤겠지만
시험을 보든 말든 중간고사란 이름은 학생들을 긴장하게 만드나 보다.
힘겹게 몸을 추려 학교로 나선다. 젠장. 밖은 왜 갑자기 추워진건지. --;

알다시피 게다가 수원까지 가야 한다.
요즘 수원으로 학교 다닌다고 하면 간혹 불쌍하게 쳐다보는 친구들 시선이 싫어서
오히려 대학로보다 시간도 적게 걸리고, 한적해서 좋다고 말을 해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 너무 멀다. !_!

그렇다. 그럼에도 갔던 게다.
오직 수업을 듣겠다는 열정, 그 하나만으로 평소 공부도 잘 안 하던 내가 이번만큼은 공부 좀 할 결심으로
그렇게 편안한 잠 대신 먼 여정을 택했던 거란 말이다!

그러나 야속한 학교는,
달랑 휴강,이란 한 마디 남겨놓고 나를 배신했다. --+
에이씨. 수업 듣는 학생, 10명도 안 되면서 연락 좀 해주면 덧나냐. 씨!
그럼 눈 좀 붙였다 오는 건데. 혹은 안 오든가. --;

어쩔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
나는 다음 수업에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빨리 작성해 낸 후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을 한다.
그리곤 10여 분만에 리포트 세 개를 작성해 낸다.
적당한 리포트 빨리 쓰기, 같은 대회를 한다면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그러나 남은 시간을 보니 다음 수업이 시작하려면 아직도 세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었다.
갈등하기 시작한다.
수업을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의지로 참아내어 수업을 들을 것인가.
내내 고민하다 이왕 온 거 수업 하나라도 듣고 가야지, 결심을 한다.

그리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강의실 맨 뒷자리에 꾸부정하게 엎드려 잠을 청한다.
예상대로 엎어지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운 좋게도 6시.
뭣 좀 고쳐달라던 형님 전화 덕분이다.

그러나 6시가 되었음에도 강의실은 아무 사람도 없었고, 교수님도 오지 않으셨다.
아. 젠장. 또 뭔가 잘못 됐나 보다. --+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끼고 강의실을 나오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휴강,이라 쓰여져 문 바깥쪽에 붙어있는 하얀 쪽지였다. !_!
아마도 내가 미리 와서 자고 있던 사이 붙여놨었나 보다.

아.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토록 피곤했지만, 꿋꿋이 잠을 참아가며 오랫만에 찾아간 학교가 도대체 왜 이러냔 말이다.
오직 수업을 듣겠다는 열정과 의지만으로 그 차가운 강의실에서 새우잠까지 자며 버텼는데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훌쩍. 젠장. --;

다른 무엇보다 그냥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혼자 있으면 별 것 하지 않은 채 게을러 하다 흘러보내는 시간들이지만
내가 당당히 게을러야할 시간을 다른 무언가로 인해 잃게 되는 것은 싫은 일이었다.



돌아오니 vluez는 열쇠를 안 가져와서 근처 PC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놈의 학교만 아니었다면 vluez 또한 추위에서 떨 일이 없었을 것을. --+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만큼 피곤하였는데
영화 한 편 보며 잠들려 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다시 더욱 말짱해져 간다.



아. 감당할 수 없는,
밤에 피어나는 섹시가이여! !_!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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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