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과의 식사 (2003-05-25)

작성자  
   achor ( Hit: 1094 Vote: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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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정영은 밥 한 끼 쏘겠다며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날씨도 흐린데다 애초에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어디 중국집에서 짱개나 하나 시켜 먹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영이 나를 이끈 곳은 동네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는 어디로 가느냐는 내 질문에 가끔 가는 곳이 있다며 조금 무게를 잡았고,
잠시 후 나는 그곳이 동네에서는 가장 대외적으로 알려진 샤브샤브 전문 식당, 할매집이라는 것을 알아맞춘다.
그곳은 우리 아처웹스.에서도 형님이 한 판 쏘실 때마다 찾던 곳이 아니던가.

언젠가 새봄이도 내게 그곳에서 밥을 쏜 적은 있지만
정영이 집 앞의 많은 식당들을 놔두고 굳이 그곳까지 갔다는 건 좀 의외였다.
남자들끼리 특별히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가는 행위는 내게 아주 드믄 일인데다가
우리 사이에 맛을 찾거나 분위기를 찾는 일은 전무하지 않았던가.



2.
같은 학교, 같은 과를 4년동안 같이 다녔으면서도 그를 학교에서 본 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그것은 내 친구들 중 학과 성적이 가장 좋았던 그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학교를 잘 가지 않았던 내 탓이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항상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으랴, 적어도 차나 음료 등은 내가 쏘는 편이었는데
오늘 정영으로부터 배부르게 한 끼 얻어먹고 나니 새삼 격세지감이 느껴져 왔다.

그는 이제 회사원의 티가 완연했다.



3.
작년 여름, 그가 괜찮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우리 집에서 였다.
그는 밝게 웃으며 기분 좋아했고,
이제 1년이 흘러 있다.

나는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결혼할 여자도 있겠다, 대체로 만족스런 일도 있겠다...

그는 별다른 건 없다고 이야기 했다.
학생시절에는 항상 불안함을 느꼈었는데 이제 적어도 그런 불안함은 없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그 점이 부러웠다.



4.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경제적인 동향이나 정책들을 IT쪽 기술인력들에게 설명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 프로그램은 잘 만들지만 경제적인 정책이나 변화 내용 등은 잘 모르잖아,라는 덧붙임은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리 호감 가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대체로 진지하고, 성격 좋은 그가 나나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고자 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일 속에서 느꼈던 점들을 진솔하게 말한 것인데 내가 좀 찔리게 받았다.

내가 기술인력으로 아무리 좋은 회사에 입사를 해봤자
대학 동기들의 설명이나 들으며, 그들이 지정한 일을 더 적은 박봉에 시달리며 해야한다는 사실이
그리 호감 가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역할에 따른 각자의 임무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그 전문성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문계 출신 관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기술의 천대이자
아직 사농공상의 유교적인 신분질서로부터 우리 사회가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한 증거이기도 했다.



5.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은
충분히 창조적일 수 있으면서도 대체로 실상은 패턴적인 일들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또한 그것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창출되는 효과가 제한적이고, 미약하며,
그러기에 그 성과에 따른 부가적인 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나는 다시금
이왕 사는 삶, 더 늦기 전에 고시나 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나 합격하는 것보다도 더 자신이 없는 건
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이다.

이런 느낌으로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을까.



6.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저녁 7시에 퇴근하는 그런 삶을 부러워 했던 건 아니다.
부장, 과장이 되어서도 언제 짤릴 지 몰라 부업을 준비해야 하는 그런 삶을 부러워 했던 것도 아니다.
상사의 몰지각한 행동에 순응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를 부러워 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 안정감이었다.

결혼, 생업.
20대 후반을 혼돈케 하는 그 엄청난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 있던 정영의 그 모습은 아주 부러운 일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대한 질주일 것이니
마냥 그렇게 내달릴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7.
그러나 그것은 만족의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그처럼 결혼할 여자와 괜찮은 직장을 갖고 있다 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만을 호소하며, 불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닐지.

아. 자신 없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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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2003-05-26 08:10:59
글쎄.
그 점에 대해선 오늘 아침의 내 글을 참고해주길 바래.

 achor2003-05-27 00:26:08
네 멋진 글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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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