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사살 (200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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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를 만나 술을 좀 마셨다.
맥주라고 얕봤는데 생각보다 좀 쎄다.
4000cc에 딱 기분은 좋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다.
적당한 게 좋다는 건 모르고 있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술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극단적인 게 좋다.
술을 조금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결국은 확인사살의 과정밖에 되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확언을 들었을 때 사실은 조금 슬펐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니지만
어쩐지 그렇게 앞으로는 쉽게 연락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느낌이 좋을 수는 없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핸드폰 1번을 생각했다.
1번은 yahon이나 용팔보다도 앞선 번호다.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보다도 앞선 번호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녀가 나와 다른 이들보다 특별한 연도 없으면서
빨간 핸드폰으로 바뀐 이전부터 연락이 완전히 단절된 지금까지도 줄곧
1번을 고수하고 있는 까닭을 생각해 봤다.
그것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 할 지라도
어쨌든 그녀는 왜 오랫동안 내 핸드폰의 1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그녀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술을 마실 때 그 상대방이 화장실로 향하면 다른 이와 통화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의미를 갖는 행동이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단순한 외로움, 누군가와 소통하고픈 욕구, 그리고 어쩐지 채워지지 않은 공복감이었다고 나는 회상한다.
덕분에 이제는 나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이가 화장실로 향했을 때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아. 술을 마시러 다시 나가야겠다.
이것은 술에서 깨어난 직후 다시 고쳐질 글이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902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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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2003-04-05 23:09:10
전화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들었던 말 중 불세출의 명언이지...

 achor2003-04-05 23:23:48
술에서 깨어났지만 특별히 고칠 의욕을 느끼지 못해 그냥 두기로 했다.

keqi. 오. 그렇구먼. 전화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먼.
그렇다면 네 말인 즉슨, 내 빨간 핸드폰의 1번이, 결코 연락 되지 않는 그녀가 내 무의식 속에서 나의 1번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구먼, 그렇구먼.
무의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은 인정하나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나의 게으름이지. --;
아주 오래 전 그녀가 스스로 내 핸드폰의 1번을 차지한 이후 나는 게으름 덕택에 그녀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고, 또한 빨간 핸드폰으로 바꿀 무렵에도 역시 게으름 덕택에 별도의 구분 없이 옛 핸드폰 순서를 그대로 차례차례 입력했었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그녀의 내 속에서의 위치가 다소 비약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야...

 Keqi2003-04-06 10:44:38
자네의 게으름 자체가 자네를 버티게 한 힘이니, 그 역시 자네의 전화기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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