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20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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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3601 Vote: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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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출사표

1.
이것은 내 삶의 거대한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그 기록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내 삶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 나이 만 서른.
서른만 생각하고 있었다.
서른까지 해보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하겠노라고.

근 1년간 생각해 왔으나 막상 주저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을
더 늦출 수 없는 이제와서야 선택할 뿐이다.

곧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정체하지 않고, 진보하기 위한 또다른 도전의 출사표가 될 것이다.



2.
내 어머니는 재치 있고, 보다 진보적인 편이셨지만
내 아버지는 엄격하고, 다소간 보수적인 분이셨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버지가 되어야만 한다면
대체적으로 내 아버지와 비슷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내 아버지의 보수적 색채는 유년기 당시에는 좀 불편했던 게 사실이고,
또한 동시에 지금의 스스로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꽤나 내성적인 편이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 시절만 해도 동내 꼬마들은 으례 우르르 몰려다니며 동내를 휘젖곤 했는데
나는 그런 동내꼬마들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집에서 홀로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고학년이 되어서부터는 매우 활달하게 변해버렸다.
기억컨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3학년 후반부터 공부를 좀 하기 시작하여
4학년부터는 소위 엄마친구아들,급이 되었고,
6학년이 되어서는 전국대회에서 수상할 정도가 되었다.
학업실력이 좋아지니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스레 내 성격까지도 변화시켰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부터의 내 삶은 거의 컴퓨터로 점철된다.
이 무렵 대개는 성에 눈을 뜨고 그로 인한 방황을 하는 청소년들이 많은 편이지만
나는 보수적인 아버지 탓이었는지 혹은 당시 유행하던 어머니의 성교육 탓이었는지
성에는 별 흥미를 갖지 않은 채 그저 컴퓨터에만 몰입돼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APPLE II의 Basic을 배우면서 시작한 내 컴퓨터와의 인연은
중학생 시절 Ketel이나 PC-Serve 같은 PC통신을 만나면서부터 급속도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제주도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와 이야기 나눈다는 게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고,
사설BBS에 접속하여 불법적인 자료를 다운로드 받는다는 게 꽤나 짜릿한 일이기도 했다.
컴퓨터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용산을 다니며 게임을 카피해 오기도 했고,
당시에는 마니아적이었던 컴퓨터 잡지를 읽으며 나름의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 결과 중학교 2학년 학업성적은 형편 없는 정도까지 떨어졌다.
학업에의 압박이 적지 않은 부모님 덕택에 3학년이 되어서는 다시 좋아졌긴 했지만
아버지가 바라셨던 과학고는
1,2학년의 학업성적까지 지원자격에 포함되었기에 지원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런 내게 당시 비평준화 지역 부천에 사셨던 중3 담임선생님은
부천고 입학을 권유하셨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여 부천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
좋은 학교라니까, 선생님과 부모님이 가보라고 하니까,
그냥 의지 없이 선택했던 것일 뿐이었다.

나는 그 결정이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게다.



3.
내 삶에서 가장 극적인 선택을 꼽으라면 단연 그 부천고 입학일 수밖에 없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성공적이고, 긍정적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약 그 때 그 시절에
부천고 대신 서울의 어느 배정된 평준화 고교에 입학했더라면
나는 그냥 그 무렵 나와 비슷했던 이들이 그래온 것처럼
대충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대충 학점도 좀 따고, 영어공부도 좀 해서
대충 괜찮은 직장에서 대충 결혼하여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나름의 모험담이 있고, 나름의 스토리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됐던 간에
지금과 같은 삶의 박력과 스케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부천고에서 완전히 각성해 버렸다.
그간 공부 잘 하고, 항상 선생님의 애정을 모두 받아오며 살아왔지만
그곳은 그런 나와 같은 학생들만 모여있던 곳이었고,
나는 그냥 그런 여러 학생 중 한 명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나를 매우 당황케 했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나만의 일이 아닌, 그 학교 거의 모두의 일이기도 했다.
개중에는 여전히 그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인정을 받는 친구도 있었고,
성적은 안 나오지만 그럼에도 착실하게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으며,
또 학교를 자퇴해 버리는 친구도 있었다.
50 여 명으로 시작한 1학년이 3학년이 되어서는 한 반에 30명도 안 되었을 정도로 자퇴는 우리에게 흔한 일이었다.
물론 내신성적이 40% 의무 반영되는 대입제도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공부를 안 하는 케이스가 됐다.
대신에 더욱 컴퓨터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부족한 수면과 과도한 전자파로 인해 구토까지 해본 경험은
컴퓨터를 업으로 살아온 현재까지도 이 고등학생 시절이 유일하다.
매일 밤 삼국지나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을 하며 밤을 새고 학교에 가다 보니
그냥 앉아만 있어도 위액이 역류해 올 정도였다.

그 시절 공부는 별로 안 했지만 대신 다양한 책을 접할 수는 있었다.
다이어리에 써놓고 다닐 정도로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길 원했던 시절이기에
소설이나 시는 배제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쩌고 따위의, 이해할 수도 없고, 고리타분 하기만 한 책들만 읽었는데
지금 기억이 남는 건 하나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행위 자체가 내 삶에는 커다란 자산이 됐다.
많이 생각하고, 또 나름의 고민을 해봤던 경험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연습이었다.

또한 그 시절은 내가 음악을 가장 많이 접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로는 친구들과 공통 관심사가 됐던 외국 록밴드의 음악을 들었지만
혼자서는 국내외 대중음악부터 클래식, 가곡,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들었다.
지금도 노래방을 가면 록 베이스인 음악을 주로 부르는 탓 역시 이 시절의 영향이겠다.
세계 최고의 명반 순우신화,가 만들어 진 것도 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러고 보면 공부 안 한다고 컴퓨터를 잠궈놓기도 했던 아버지께서
원한 적 없는 전자키보드와 미디장비까지 사주셨던 건 무슨 까닭이었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아버지의 지원 덕에 어설픈 곡이나마 작곡해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다.

비록 공부는 조금 도외시 했지만
이 시절의 책과 음악이 나를 더욱 좋은 사람으로 만든 건 분명하다.

나는 부천고에 감으로써
평범한 삶을 잃은 대신
진정한 삶의 멋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게다.



4.
서울에서 부천으로 통학했던 그 시절 내 내신성적은 형편 없었지만
그럼에도 단지 내가 부천고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네에서는 통했다.
나는 여전히 엘리트적인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니던 독서실의 실장은 내게 독서실 열쇠를 주며 마음껏 공부하라고 전권을 맡길 정도였고
나는 밤새 독서실에서 홀로, 혹은 친구와 지새며 공부하는 척을 했다.
아침이 되면 아버지가 찾아와 학교까지 태워다 주시는 삶이었다.

그 기나긴 독서실에서의 밤 시간에
나와 내 친구는 종종 대학 이후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 친구는 전위예술가가 꿈이었다.
그는 예술관련 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로에서 전위예술을 하고 싶어했고,
나는 전위예술가를 꿈꾸진 않았지만 그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문화와 예술에 흠뻑 빠져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대학로에 위치한 성대에 지원했던 한 이유였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대학생이 되면 바로 독립하여 대학로에 방을 잡고 같이 예술을 꿈꾸며 살기로 했고,
마로니에공원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성지이자 가고자 했던 이상향이었다.



5.
40%나 반영되는 내신성적 탓에 내 대입은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능이나 본고사쪽은 그래도 곧잘 봤던 덕택에 대입은 대충 할 수 있었다.

내심 내가 법대 진학하길 바라셨던 아버지였지만
강요는 없었다.
물론 수학을 잘했던 내가 문과를 택한 데에는 아버지 영향이 컸던 게 사실이지만
이미 고3까지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내 속에 투영시키는 데에 한계를 느끼셨던지
대학과 학과 선택은 전적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커서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신문을 보며 한국의 수출증대나 해외에서의 성과가 마치 내 일인양 매우 기뻐하곤 했는데
커서 그런 무역상사에 입사하여 훌륭한 수출역꾼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일단 경상대,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던 그 시절엔 수학을 좋아한다면 경제학과를 가라는 얘기만 듣고
경제학을 지원했고,

또 하나는 당시 일본만화 3X3 EYES를 보며 힌두교에 흠뻑 빠져있었기에
외국어대학교 인도어학과에 지원하려 했다.
(훗날 일본에 갔을 때 사들고 온 몇 안 되는 것 중 한 가지가 3X3 EYES 전집이었다)
이미 그 시절에도 나는 종교에 학문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힌두교쪽을 좀 공부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렸고,
또 내심 생각해 봐도 인도어 전공하고 먹고 살 것도 걱정되어 결국은 다른 좀더 삶에 도움이 될 법한 언어로 바꿔 지원했다.
무슨 언어였는지 이제 와서는 잘 기억도 나지는 않지만...

대학 입학 후 나와 그 독서실 친구는 계획대로
대학로에 살아갈 방을 찾아다녔고,
대학로에서 공연하던 한국 마임의 1인자를 찾아가 마임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학 신입생 신분이라는 게 여기저기 끌려다니기도 하고, 또 그간 맛보지 못했던 신세계가 펼쳐지기도 하여
가장 바쁜 시절이 아니던가.

우리는 가계약까지 했지만
결국 계약금만 날리고 흐지부지 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대신 나는 대학 와서 처음 맛보는 쾌락과 향락에 빠져있었다.
내 삶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칼사사를 만든 것도 이 시절인데
우리 모두는 학교는 가지 않은 채 매일 모여 하루하루를 술로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달콤한 시간이였기에 독서실에서 꿈꾸었던 문화와 예술은 완전히 잊혀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나를 일깨웠던 건 여름방학 때 걸려온 그 독서실 친구 어머니의 전화 한 통이었다.
독서실 친구는 그의 꿈대로 1학년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독립을 감행해 냈다.
물론 얼마 후 부모님께 잡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사건은 나를 대학 신입생의 단꿈에서 깨어나게 했다.

나는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9월 9일 독립을 하였고,
그리고 삶의 주체자가 되었다.



6.
삶의 주체자가 된다는 명분은 거창했지만
사실 삶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나는 학교를 가는 대신 술을 마셨고, 영화를 봤으며, 일을 했다.

소설을 배척했던 고등학생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소설가 박일문 씨의 열렬한 팬이었고,
내 독립은 그의 말대로 부모님이 주시는 먹이를 먹고 사육되는 토끼가 되지 않기 위해
금전적으로도 독립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했는데
그 시절의 노동은 오히려 놀이였다.

처음 독립하여서는 편의점 알바를 했고,
1-2달 일한 돈으로 방을 구하고 리어카와 붕어빵기계를 샀다.
나는 독립했던 그 해 겨울 붕어빵 장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이 아니라 매우 짜릿한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

놀기 바빴던 탓에 실제로 붕어빵을 판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첫 경험이 내게는 좋은 선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과외 같은 것 대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경험을 쌓는 것에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삶을 경험에의 질주로 이끌었을 지 모르겠다.

내 방에 나이트에서나 있을 법한 사이키 조명을 설치해 놓고
낮에는 춤을 연습했고, 밤에는 춤추던 친구들과 교대로 중국요리를 배달했으며, 돌아와서는 영화를 보면서 잠들었다.
때로는 공장에서 일해보기도 했고, 때로는 짐을 날랐으며, 또 때로는 설문조사를 다니기도 했다.
다양한 삶 속에서 다양한 이들과 소통했던 시절이고,
나는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고등학생 시절 배척했던 시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절이다.
류나 하루키 같은 일본 작가들을 좋아했고,
학생운동권 소설가들을 접하며 내 시대에는 이미 쇠퇴해 버린 그 투쟁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학교 뒷산 정자에 홀로 올라
청록빛 수풀 속에서 책을 읽다 졸리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던 그 시절은
내 삶의 가장 평온한 기억이기도 하다.

내 삶에는 좋은 친구들과 문화, 예술이 있었고,
육체적 자유와 정신적 풍요가 있었으며,
그리고 멋이 있었던 것이다.



7.
그리고 아처웹스.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인터넷을 매우 싫어했다.
내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는 PC통신은 인터넷에 의해 쇠퇴해 가고 있었고,
그러기에 인터넷은 내 주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틈틈히 공부한 웹개발스킬은
당시에 먹어주는 것이었고,
시장의 수요도 충분하여 그것이 내 일이 되어버렸다.

이 역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 회사의 사장이 되어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세무관계도 걱정해야 했고,
지원하고, 입찰하고, 제안하는 일들은 내게 생소하면서도 멋진 일이었다.

그러기에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열심히 했기에 별 이력도 없던 내가
이래저래 좋은 경력들도 쌓을 수 있었고,
신문, 잡지에 기사를 연재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며 공청회 같은 데에서 내 생각을 말할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며,
또 내 평생의 은인, 기중형님을 만날 수도 있었다.

삶의 멋을 유지하면서도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타협점을 나는 찾아냈던 것이다.



8.
리2와 함께 한 지난 5년은 어찌 보면 내 삶의 잃어버린 5년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5년 동안에 많은 것을 잃었다.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정체돼 있었고, 그것이 곧 퇴보였으며,
세상은 나와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잠시 멈춰서 있던 내게 세상과의 거리는 벌어져만 갔다.

물론 그 어느 곳보다도 거칠고 지저분한 세상 속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공존하는 법을 진실로 배워왔지만
그러나 생산적이지 못했고, 비효율적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서른까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자유롭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은 서른까지 해보고,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8년, 나는 기어이 3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왔다.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결국 행복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자신이 꿈꾸던 대로의 삶이었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문화와 예술, 자유와 풍요, 삶의 멋을 위해 꿈꿔온 대로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고 세상의 방식에 편입하여 평범하게 살아갈 것인가.



9.
한쪽에는 이념이나 철학, 이상과 사회는 접어둔 채
직업교육원과 같은 대학에서 취업준비에 코피 쏟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개인과 가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고민은 접어둔 채
순간의 향락과 본질적인 이성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있다.

갈수록 문학과 예술, 문명과 관념을 중시하는 자들은 사라져 가고,
또 그런 자들은 사회에서 패배자로 낙인 찍히는 세상이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내가 내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 실패를 자인하는 것은 될 수 없다.

나는
더 크게 내 삶의 방식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많은 걸 배워야만 한다.
정체된 채 시간을 흘러보내고 만다면
북극곰 잡는 법을 완전히 알게 됐으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늙어버린 에스키모가 될 지도 모른다.
더는 늦출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한 가지 한 가지 방향을 정해본다.
이왕 세상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깊이 생각하고 원하는 걸 제대로 찾아내야 한다.

우선 좀 규모가 있는 곳으로 가자, 큰 곳에서 더 크게 배워보자.
또한 시야가 좀 막히게 되는 개발쪽보다는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는 기획이나 마케팅쪽으로 가자.
그리고 일이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 전공이기도 하면서 관심분야이기도 한 경제나 미디어, 혹은 게임쪽 분야를 택하자.

그렇게 나는 내 세상에 대한 첫 발자취로
금융 전문 그룹사의 엔터테인먼트 계열사를 선택해 냈다.

비록 단기간 회사를 다녔던 적도 있었지만 그 때와는 다르리라.
이제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해서도 안 되고, 쉽게 사표를 써서도 안 되며,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는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어쩌면 이제 아침, 저녁으로 영어공부나 운동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 마시며 미드를 즐기고, 때로는 사람들과 다투며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평범한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삶의 멋은 이제 좀 없어지리라.
그러나 아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멋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멋있는 삶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의 멋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위해 배우러 가는 것이다.

곧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정체하지 않고, 진보하기 위한 또다른 도전의 출사표가 될 것이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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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현석2008-04-12 19:46:48
형 멋있어요 한마디로.
매사 긍정적인 추진력과 결단력.. 저에게 없는 것들이라 부럽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achor Empire2016-04-13 06:21:28
8년 전 출사표
그러고 보니 출사표를 던지고 세상에 입문한 지 어느새 8년... 그 길지 않은 시간 속에 참 많은 것들이 변해 있다. http://achor.net/board/diary/1080 솔직하면서도 당당했던, 멋진 출사표라고 지금 와서도 생각했다. 그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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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