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2002-09-28)

작성자  
   achor ( Hit: 959 Vote: 1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지난 목요일은 나로서 아쉬운 하루였다.
나는 개강한 지 한 달 내에 전 수업을 다 듣는,
1996년 이후 전무후무한 최대의 기록을 작성할 뻔 했었다.

이것의 의미는 야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더 쉽다.
이를테면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의 전 구단을 상대로 세이브를 올린다거나 최희섭이 전 구단을 상대로 안타를 치는데
그것이 고작해야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대단한 일일 게다.
나는 그런 기록을 작성할 뻔 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결국 나의 대기록 작성을 용납해 주지 못했다.
나는 목요일, 마지막 수업을 하나 남기고 정해진 시각, 정해진 강의실로 들어갔지만
그곳에는 내 수업 대신 다른 수업이 열리고 있었다.
강의실이 변경된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변경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무척이나 아쉽게 됐지만, 하지만 만족한다.
나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고,
다만 일이 안 풀린 것은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 학생에게 정보 전달은 뒷전으로 미룬 채 마음대로 지정된 수업을 변경한 학교, 혹은 교수의 문제다.
나는 후에 강의 평가에서 이 점을 지적해 줄 것이다.


2.
아무래도 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그것보다는 무언가 배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게다.
혼자 도서관에 앉아 고시 공부 하듯이 공부하는 건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내게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고를 보고 있는 건 즐겁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좋은 지식을 갖고 있기에 어떤 분야의 이야기라도 들음에 재미있고, 유용하게 느껴진다.

나는 조세정책을 더 유용하게 세우는 법이나 동기식 카운터 만드는 법,
전파의 진폭과 사이클, 한국경제의 역사나 프로토콜의 구성과 역할, 암호화 기법 등
모든 분야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다.
이 모든 과목들이 그저 수강신청이 가능했던, 내 의지의 범위를 넘어선 선택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대학원에 가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줘야겠는데
다만 문제는 두 가지다.

우선은 그들이 내가 그간 그들의 이야기를 그다지 재미있게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에 더 이상 이야기 들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음은 나는 이 재미있는, 모든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만을 골라 내내 들어야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다시 지루해질 것도 같다는 것이다.


3.
머리를 잘랐다.


4.
결국 나는 중도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의 성향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친진보 대신 중도를 말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 며칠 몇 명의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는 학창시절 모범생처럼 공부하였으나 이제는 단란주점에 아가씨를 대주는 보도 일을 하고 있었고,
한 친구는 학창시절 야타를 하거나 가출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한국 6대기업의 핵심인력이 되어있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대충 공부하고, 대충 놀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대충 일하고, 대충 놀고 있다.

나는 어떤 이보다는 보다 친사회적으로 기존의 세력질서, 이를테면 취업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반면
또 어떤 이보다는 보다 덜 사회적으로 기존의 세력질서, 이를테면 취업 같은 것에 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셋은 학력지상주의의 한국 사회에서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같은 시작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 과거도, 또 그 미래도 상이할 것이 자못 스릴감 넘치는 게임 같은 느낌과 또 일말의 회한 같은 느낌도 함께 주었다.

나는 친구들과 술집이나 나이트, 단란주점을 전전하며 잠과 술에 취해
이 오묘한 사회의 진리를 다시금 질겅질겅 되씹어 주었다.


5.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 날도 여느날과 다름 없이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교내 서점을 묻고 있었다.
이제 대충 강의실 위치는 알고 있지만 교내 서점이나 식당, 도서관의 위치는 모르고 있었던 터다.

그런데 내가 물어본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게다.
그것도 초등학생 시절 나를 꺾고 학생회장이 되었던 적! --+

역시 동창은 좋은 지라 그는 지도를 그려가며 학교의 전반적인 구조를 설명해 주었고,
심심해 하는 나를 위해 같이 밥도 먹어주었으며, 공강시간에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이것저것의 장치들도 알려주었다.

그는 학생회장 출신답게 엄청난 사교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5년만에 복학한 학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교내 매점 아가씨들, 아줌마들 등과
서슴 없이 농을 건내거나 장난을 치는 사이였다.

그런 사교성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지만
역시 내 길은 아니라고 이내 그 부러움을 접었다.
누구나와 친해지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092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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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